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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duwinetasting Aug 22. 2021

와인 레이블, 향과 기억

mandu의 와인 이야기 & 테이스팅 노트

'마신 와인을 어떻게 다 기억하세요?'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분야라면 자꾸 들여다보고 살피고 찾아보고 탐구하니 아무래도 기억에 오래 남을 테다. 내가 마신 (또는 잠깐 혀만 적신) 모든 와인을 기억하지 못한다. 모조리 기억해두고 싶지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와인 레이블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마셔본 녀석인지 아닌지. 병 속 와인에 대한 정보를 담은 레이블은 와인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유용한 기능 말고도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다. 레이블에 적힌 글자,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씨체와 화려하거나 심플한 바탕이 와인 생산자 또는 양조가가 보내는 와인에 관한 힌트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와인 레이블에 성(castle)이나 포도밭이 그려져 있으면 좋은 와인이라는 말도 얼핏 들어서 그런 와인을 골라 마셔본 적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와인을 레이블로 기억하고 있었다.


와인 레이블에는 와인 이름, 빈티지, 국가, 빈야드, 알코올 도수 (ABV) 등을 비롯해 뒷면에는 간략한 설명이 있는 경우도 있다. 혹은 최대한 설명은 배제한 채 그림 하나로 와인을 표현하기도 한다. 문장이나 샤또/도멘을 상징하는 표식이 보이기도 하고 양조가의 서명이 들어간 와인도 있다. 와인 레이블은 마치 책 표지처럼 손길이 가기도 하고 그저 스쳐지나기도 한다.


마신 와인의 향은 내 기억 속에 저장되기도 하고 가슴에 남기도 한다. 유독 그런 와인이 있다. 가을비가 내린 끝이라 그런 건지 밤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추억에 젖어든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와인이 있다.

콜긴 나인 에스테이트 레드 (Colgin IX Estate Red) 2004. 같이 먹었던 요리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와인만큼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픈하고 따라준 첫 잔에 담긴 붉은 액체는 장미향을 내뿜고 있었다. 검붉은 베리류와 커피콩 내음도 진하게 올라왔지만 이건 무조건 장미였다. 코를 잔에 가져다 대고 아로마를 맡으며 이렇게 맛있는 나파캡 (Napa Cabernet Sauvignon을 줄여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은 처음이라며 감탄을 했다. 2004 빈티지면 시음한 시점을 기준으로 15년이 넘은 레드 와인이다. 까베르네 쇼비뇽을 비롯해 메를로, 까베르네 프랑 그리고 쁘띠 베르도가 섞인 와인이다. 나중에서야 찾아봤지만 와인 비평가 로퍼트 파커(RP)가 98점을 준 와인이었다. 부드럽지만 속이 단단하게 채워진 듯한 이런 와인을 만난 게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장미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장미향이 이렇게 좋았나 싶었던 그런 와인이었는데 화려한 장미향과 대조되는 깔끔하고 모던한 레이블이 마음에 들었다. 

터키 플랫 쉬라즈 (Turkey Flat Shiraz) 2005.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순간을 되살려주고 또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추억을 상기시키는 와인이다.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 와인인데 그래서 그런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쉬라즈는 다 진하고 묵직한 와인으로만 알았던 시절, 세월을 간직한 쉬라즈가 얼마나 매력 있는지 강인함이 누그러져 혀끝에 닿을 때 얼마나 저릿한지 몰랐다. 저릿함과 짜릿함 사이를 오갔던 와인으로 기억한다. 와인 비평가 점수에 집착하지 않고 참고만 할 거라며 찾아보고는 RP 95점에 괜히 흐뭇해진다. 호주 바로사 밸리 쉬라즈의 퀄리티가 이 정도라며 뽐내던 와인으로 기억하다. 중앙에 그려진 수채화 색감의 새 한 마리 때문에 절대 잊히지 않는 와인이기도 하다.

로드니 스트롱 까베르네 쇼비뇽 (Rodney Strong Cabernet Sauvignon) 2008. 와인 모임에 들고 간 첫 와인이자 사람들이 맛있게 마시는 걸 보고 내 선택에 만족했던 와인이다. 사실 이 때는 와린이어서 와인 고수들과 함께 한 자리에 혹시나 민폐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을 했었는데 와인 매니저분이 추천해주신 와인 중 하나가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비싼 와인은 아니었지만 진한 블랙베리와 코코아 같은 아로마가 올라와서 그날의 소고기와 잘 어울렸다. 그리고 레이블에 포도밭 그려져 있어서 고른 거 맞다. 그러고 보니 이 와인은 수입이 중단된 거 같다. 다른 맛있는 와인들로 대체되었겠지만 내 기억 속에는 와린이의 첫 굿 초이스 와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글로 기록을 남긴다는 건 쉽지 않다. 특히, 꾸준히 하기란 어렵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목표는 글 50개였다. 

다음 목표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글로 기록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된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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