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경기도 구리시 경계에는 우리나라 특급 호텔로 꼽히는 워커힐 호텔이 있습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경치가 좋다보니 호텔 숙박 목적이 아니더라도 찾는 이들이 많은 곳인데 특히 매년 열리는 벚꽃축제 기간이 되면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아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죠.
많은 사람들이 워커힐 호텔을 외국의 호텔 브랜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워커힐이라는 호텔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특정인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입니다. 1963년 개관한 워커힐 호텔은 1973년 선경그룹(SK)에서 인수한 후 쉐라톤이라는 호텔 체인과 계약을 맺으면서 쉐라톤 워커힐 호텔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로인해 외국계 호텔 브랜드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지고 워커힐이라는 이름의 취지는 많이 잊혀지게 됩니다.
워커힐 호텔은 월턴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라는 한국전쟁 영웅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입니다(Walker+Hill). 초대 미8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그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6.25 한국전쟁의 결과는 지금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도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한 공산군은 우세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빠른 속도로 남진하여 국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3일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했습니다. 이 후 계속된 남진에 국토의 대부분이 함락되고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되었죠.
낙동강까지 밀린 우리군과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갔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에서 왜관에 이르는 서부 방어선을 UN군이 사수하고 왜관에서 포항에 이르는 동부 방어선은 국군이 사수했는데 국토의 약 10%에 불과한 부산교두보를 간신히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급파된 워커장군은 상황 확인 후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부산까지 밀리는건 시간 문제며 전쟁은 끝장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후 방어 아니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결사항전을 주문하고 결코 후퇴란 없다는 말과 함께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00여대에 이르는 폭격기의 융단폭격을 비롯해 피난민을 앞세워 공격하는 악랄함까지 보였던 공산군을 막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라고 하지만 워커장군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을 지키겠다며 결사항전을 이어갔고 사기가 오른 아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죠.
이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고 총반격과 함께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한 우리군과 UN군은 국토 통일을 앞두게 됩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밀려내려오게 되면서 지금의 휴전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당시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면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했으며 우리 정부는 해외에 망명정부를 세웠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남한 최후의 저지선을 목숨을 걸고 사수했던 워커장군은 안타깝게도 한국 전쟁 중 사망했습니다. 북진했던 아군이 다시 밀려내려오던 무렵인 1950년 12월 23일, 미군과 영국군의 진지를 시찰하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 사고로 차량이 전복되면서 자신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죠.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계급은 대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 주한 미8군 사령부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죠. 우리나라는 워커장군의 전공를 기리기 위해 추모식을 진행하고 그가 사수한 낙동강 방어선을 워커라인으로 지정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워커힐 호텔이라는 이름은 전쟁 후 우리나라에 주둔 중인 주한미군이 휴가 때 마땅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떠나는 것을 알고 그들을 유치하기 위해 호텔을 세우며 호텔이름을 워커힐로 지정했습니다. 2009년에는 그를 기억하는 한국과 미군의 노병들이 자신들의 사재를 털어 표지석을 세우며 워커장군을 기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