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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톡 주인장 Aug 23. 2023

오늘도 우리 엄마, 윈!

엄마 말 잘 듣는 딸로 만드는 세상이 싫다고요.

직장생활 중에는 ‘5보 이상 승차’로 정유업계와 대기오염에 공헌하다가 퇴직 후 몇 년 뚜벅이를 거쳐, 요즘 다시 사무실 지하주차장 등록 고객이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몸통에 비해(배통이 정확한 표현인가?) 팔다리가 가는 편인데, 나이와 함께 근육이 사라지는 걸 육안으로 확인하며 위기감 발동. 그러던 차에 긍정에너자이저 지인의 추천으로 운동 단톡의 멤버가 됐다. 각자 100일 동안 최소 하루 40분 운동을 하고 스스로 단톡에 인증을 남기는 모임이다. 가장 간편하기도 하고 월드컵 공원 지역 거주라는 이점을 살려 ‘걷기’를 선택했다. 


유난히 덥고 습한 여름철 걷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난생 처음 꾸준히 걷기를 실천했다. 최소 하루 8천보를 목표로 온 동네를 싸돌아 다녔다. 하늘공원의 이러저러한 코스를 메인으로, 지겨우면 동네 소공원, 불광천과 홍제천, MBC 등 방송국 거리, 월드컵아파트 단지들, 대로와 골목 등등을 사이드로 곁들였다. 상암동 거주 10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동네를 다녀본 건 처음이었다. 

걷기를 하다 팟캐스트 재미에 빠져 정희진의 공부, 책읽아웃, 여둘톡, 비밀보장 등의 애청자가 되었으니 일석이조라 아니할 수 없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휴대폰과 이어폰을 챙겨 운동화끈을 조이고 나설 때는 발걸음 가뿐, 마음은 뿌듯!


서론이 길었다…. 나의 즐거운 걷기에 예상치도 못한 복병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엄마다. 밤마다 어디 가냐,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여자 혼자 어딜 가냐, 공원엔 할 일 없이 어슬렁대는 잡놈들이 드글거린다 등등 잔소리와 헛소리(?)를 퍼부으신다. 뿐이랴. 집 나선 지 30분만 지나면 어디냐, 언제 오냐, 이제 들어와라, 공원에 너 혼자 있는 거 아니냐, 수시로 전화해서 나를 괴롭히신다. 개 산책시키는 사람, 마라톤 연습하는 팀, 산책하는 부부 등 길목마다 환한 불빛에 사람 많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소용없다.

처음에는 혼자 두고 나가는 게 싫고, 밤 공원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았는데, 듣다 보니 멘트 핵심이 내가 남자를 만날까, 또는 남자가 나에게 수작이라도 걸까 봐 걱정하시는 내용이다. 아닌 게 아니라 누구 만나러 매일 나가는 거냐고도 하셨으니… 의처증이 이런 건가 싶어진다. “엄마 내 나이가 60이 넘었어. 나 할머니야. 누가 나한테 말을 걸어?!” 짜증 섞인 내 말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가 할머니면 공원에 할아버지는 없겠냐??”로 응수하신다. 아 말문 막힘. 저렇게 순발력 뛰어난 양반이 왜 해마의 가장자리는 까맣게 변하고 경도인지장애니 초기 치매니 하는 판정을 받으시는 건지. 


그런데 말이다… 최근 사회면을 장식한 끔찍한 사건들을 보니, 큰소리 치던 마음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대낮에 공원 둘레길에서 참변을 당하고 사람 많은 대로도 안심할 수 없는 세상. 얼마 전 토욜 아침에는 보행 장애를 주는 마라톤 단체를 피해 한적한 공원 메타세콰이어길로 접어들었는데, 잡목에 양쪽이 가려진 좁은 오솔길이 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뛰듯이 걷고 말았다.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화도 내고 한숨도 내쉰 끝에 든 생각, 아, 우리 엄마가 옳았나… 

이제 갈수록 해가 짧아질 텐데, 걷기를 포기하고 요가라도 등록해야 하는 건지, 살짝 고민이 된다. 팟캐스트 들으며 동네 헤매고 다니는 즐거움을 포기하기 싫다고!! 왜 나쁜 놈들은 활개치고 다니고 우리들이 피해야 하느냐고!!! 왜 내가 엄마 말을 들어야 하게 만드냐고!!! 이래저래 언짢은 2023년 늦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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