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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눈의 도둑 고라니를 통해 깨달은 것

칼럼에 대한 단상 1) 김해자 시인의 눈으로 살펴본 삶의 복합성에 관하여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꽃도둑의 눈 - 경향신문 (khan.co.kr)

이 언덕에서 100m쯤 아래, 그러니까 동네 한복판에 살 때는 고라니가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꽃도 따먹고 막 올라오는 콩잎도 따먹고 상춧잎도 따먹는데 매번 놀라웠다. 눈이 얼마나 밝으면 그 캄캄한 데서 어찌 그리 여린 순만 잘도 골라 따먹는지. 만나면, “다 건드리지는 말고 몇 개만 정해놓고 따먹어라, 그래야 나도 먹고살지” 협상을 해보려도 불가능했다. 활동하는 시간대가 달라 마주칠 일이 없으니, 나는 나대로 심고 고라니는 고라니대로 따먹고. 어쩌다 마주쳐도 후다닥 뛰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니 말 걸 새도 없다. 앞에 없는 고라니에게 “이놈의 시끼 여기저기 다 찝적거려 놓고” 혼자 혼낼 수밖에. 동네 어른들 말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독이 있어서, 입에 닿으면 작물들이 시름시름 앓다 제대로 일어서기 힘들단다.
(중략)
그제 밤, 잠시 걸으려고 밖에 나갔는데 30여m 지척에서 갑자기 짐승 소리가 났다. 처음엔 동물 쫓으려고 틀어놓는 개소리인 줄 알았다. 서너 번 듣고 보니 아니었다. 쫓는 소리는 쫓기는 자의 처철함이 없으니까. 이어지는 간헐적인 비명에서 덫에 걸린 고라니가 연상되었다. 다리가 절단나는 엄청난 고통이 아니고는 그런 소리가 날 수 없다. 결국 10분도 못 걷고 다시 집 안으로 피신하고 말았지만 이미 들은 비명은 귓속에서 삭제되지 않았다. 내가 저 풀숲의 고라니라면, 내가 불꽃 튕기며 불도저에 베어지는 숲의 나무라면, 내가 반죽기계 속에 남겨두고 온 피칠갑 된 손이라면….
미안함과 죄의식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구나. 빵 하나 사 먹으면서도 그 빵을 만들다 죽은 누군가가 내 속으로 들어오고, 생명을 먹여 살린다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쇠그물 치고 쇠판 덧대어 문을 달고서도 덫에 걸린 누군가의 비명을 들어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구나. 생태살해와 인권살해는 한 잎의 앞뒤였구나.

경향신문, 칼럼《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꽃도둑의 눈> 中


옛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똑같은 것을 경험해도 각자의 상황과 배경지식에 따라 발견할 수 있는 게 다르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다른 누군가는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이로써 알게 되는 것이 하나 더 생긴다. 감수성은 그렇게 길러진다. 타인은 물론 식물, 동물 등 나를 둘러싼 것들을 자세히 살피려는 애정 어린 시선, 그리고 ‘나’라는 존재 또한 그 속에서 시작되는 생각의 겸손함에서 길러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이러한 삶의 복합성, 그러니까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입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밭에 매일 무단침입하던 고라니를 그리 쫓다가도, 마침내 마주한 모습에서 ‘맑은 눈’을 먼저 찾아낸 화자의 태도가 바로 이 지점을 관통한다. 그건 세계 멸종위기 동물에 놓인 고라니의 처지도 있지만, 그보다도 화자는 한 ‘생명’을 들여다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화자는 한 짐승의 비명에서 자신이 보았던 고라니를 떠올릴 수 있었고, 여기서 나아가 반죽 기계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 화자가 삶의 단편적인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는 ‘굶주린 고라니와 그를 쫓는 인간의 추격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을 것이다.


꼭 거창하고 대단한 움직임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사사로운 것에 지나지 않았던 개인의 삶이 사회와의 연대가 가능해지는 순간 세상은 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자의 말마따나 우리가 당연하게 먹고 보고 누리는 것들 뒤에는 반드시 무언가의 존재와 희생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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