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상식이 무식이 되는 순간

예술과 환경을 대하는 양극단의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사진 설명: 환경단체 ‘마지막 세대’의 활동가들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각) 독일 포츠담의 바르베리니미술관에서 19세기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연작 그림 <건초더미>에 으깬 감자를 끼얹은 뒤기후변화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마지막 세대 제공, AP 연합뉴스


최근 기후활동가들이 예술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영국·유럽의 주요 미술관들이 석유 반대 운동의 무대가 된 것. 시위자들은 고흐의 <해바라기>,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명화에 액상 토마토나 케이크를 투척하고 액자에 몸을 접착한 뒤 이렇게 외쳤다. “소중한 작품이 공격받는 걸 보는 기분이 어떤가? 지구가 공격받는 것은 괜찮은가? 인류의 미래를 죽이는 화석연료를 당장 금지하라!” 즉, 그들이 ‘공격’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정치권과 언론, 우리의 무관심이었다. 코로나19 이후 정체된 기후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여론의 주목을 끌어내려는 계산된 행동이었기에 작품 자체는 훼손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류 여론은 ‘경악스럽다’ ‘과격하다’는 반응이고, 대부분의 활동가는 체포되어 재판 중이거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치가들은 이런 ‘과격’ 시위를 강하게 처벌하는 신속한 법안 발의를 약속했다. 한시가 급한 기후위기 대응이 한없이 지체되는 걸 보다 못해 일어난 시위를 근절하는 것이 당국에 가장 시급했던 모양이다.

함부로 다뤄지는 자연과 보물 취급받는 예술을 비교한 발상이 처음은 아니다.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는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의 창립자 폴 왓슨은, 심해를 무참히 파괴하는 트롤 어업을 이렇게 비판했다. “누가 루브르박물관에 포클레인을 끌고 들어가 작품들을 박살 낸다면 당장 감옥에 갈 것이다. 전세계 바다와 밀림에선 그런 일이 지금도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처벌은커녕 정부 지원을 받는다.” 길어야 수천년인 미술사에 비해, 수억만년의 진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자연이란 작품에 대해 우리가 무지하다는 진단은 틀리지 않다. 인공물과 자연물에 대한 가치 평가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를 이유가 있을까?

한겨레 [김한민의 탈인간] "극단적 상식, 상식적 극단" 中


예술과 환경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그게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가’의 여부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파편화된 빙하 조각 위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북극곰의 존재를 보고도, 그의 모습을 낮고 서글픈 목소리로 읊는 나래이션을 듣고도 ‘북극곰이 너무 불쌍하다’라는 말뿐 크게 동요하지 않는 태도는 잠시 후 해당 광고가 끝나고 나면 10초도 안 되어 잊고 마는 게 인간들의 현실이다.


물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북극곰의 모습이 불쌍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이와 같은 감정적인 접근은 결국 실천적인 결과를 남기기 어렵다. 북극곰이 불쌍하다는 단순한 연민보다는 그의 주요 서식지였던 빙하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까지 생각을 도출해내는 게 그 광고가 의도했던 바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환경 문제를 진심으로 고민하고 직시하기가 힘들다. 단지 조각 나 떠다니는 빙하 조각과 그 위의 북극곰이 나에게서 멀리, 아주 멀리 있다는 이유로. 채널을 바꾸면, TV를 끄면 더 이상 눈에 안 보이게 되고 그러면 지금 당장 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이란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된 존재라 말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자신의 편의성과 이해관계에 따르는 존재이다. 한 치 앞조차 내다보지 못한 채 눈앞에 들이닥친 일들을 마주하고 옮겨 나르기 바쁠 뿐이다. 이런 게, 우리가 그토록 떠들어대던 ‘인간은 가장 진화된 존재이다’의 최선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바르베리니미술관에서 행해진 환경단체 활동가들의 실천이 어쩌면 꼭 필요했을, 그러니까 언젠가는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마주해야 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네의 <건초더미>를 비롯 고흐의 <해바라기>, 다반치의 <모나리자> 같은 예술품들은 시간을 내 들여다보고 관심 가지면서 사실상 그보다 더 급한 환경 문제에는 태평한 사람들을 자극할 수 없었을 테니까.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환경에는 관심이 없다’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 두 영역에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오늘날 시대가 예술과 환경을 대하는 ‘감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초점을 둔다면 보장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환경에 대한 게 그렇다. 나 하나 바다에 쓰레기 버리지 않는다고, 플라스틱 컵 대신 개인 텀블러를 가지고 다닌다고 서둘러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무엇이 상식일지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환경을 위한 그 어떤 작은 행동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나서야만 한다.


최근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점차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면서 환경을 대하는 태도 또한 함께 자유로워졌다. 지난밤 사람들이 휩쓸고 간 한강 변에는 쓰레기더미가 발자취를 대신하고 행사장 한편에는 먹을 줄만 알았지 치울 줄은 몰랐던 사람들의 일회용 컵들이 가득하다. 과연 누구를, 무엇을 믿고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걸까?      


미래의 우리에게 묻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맑은 눈의 도둑 고라니를 통해 깨달은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