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진중권, [진중권 칼럼] '피에타가 된 대통령 부인'을 읽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22161#home
영부인을 수행하는 촬영자는 사진기자가 아니라 사진작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둘은 영상의 문법이 사뭇 다르다. 작가의 경우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서 가공을 하게 된다. 그러니 사진이 회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로써 현실이 허구화한다는 데에 있다. 문제의 사진은 보도사진이 아니라 홍보사진에 속한다. 촬영자는 그 문법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에게 사진 속 영웅은 아이가 아니라 의뢰자인 대통령 부인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정작 중심이 되어야 할 병든 아이가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역대 대통령 부인 중 이렇게 미모가 아름다운 분이 있었냐.” 윤상현 의원의 말은 그 사진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났음을 증명한다.
.
문제의 사진은 미학적 비평의 대상이지 정치적 공방의 소재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통령 부인의 활동을 담은 사진이 갖추거나 피해야 할 특성에 관한 진지한 논의이지, 대중들 사이에 거친 혐오의 감정을 부추기는 언사가 아니다.
중앙일보, 진중권, [진중권 칼럼] '피에타가 된 대통령 부인' 中
대통령 부인의 캄보디아 자선병원 방문 사진을 두고 한동안 말이 많았다. 가난에, 심장병에 수척해진 아이를 안고 있는 대통령 부인의 모습이 현실 반영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점에서 ‘빈곤 포르노’가 아니냐는 민주당 의원이 지적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사진의 구도, 포즈 등에서 과거 오드리 햅번의 사진과 겹치는 점이 있어 더욱 조명되었다.
여기서 코미디는 정작 이러한 지적을 받은 당사자들은 이 빈곤 포르노가 뭔지도 잘 몰라 ‘장 의원이 성적 뉘앙스를 풍기는 언사를 사용해 대통령 부인을 모욕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며 발끈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이용되어 온 선정주의적 보도 기법인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을, 정치 한가운데에 있는 이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래서 문제 제기에 대한 인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이 사뭇 인상 깊었다.
그 시작은 빈곤 포르노였으나 결국 “역대 대통령 부인 중 이렇게 미모가 아름다운 분이 있었냐.”라는 윤상현 의원의 말마따나 이 일은 대통령 부인의 대상화로 마무리된 논쟁이 되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양상이 대중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땅한 지적은 아니었으나, 애초에 이해관계와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캄보디아 자선병원에서의 사진 한 장을 두고 ‘빈곤 포르노’라는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이며, 만약 이 개념이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면, 우리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문제의 사진을 봐야 하는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사진 속 대통령 부인의 표정, 얼굴, 분위기 등만이 지속해서 이야기됐다. 이야기보다도 단순 소비에 더 가까운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진을 찍은 자는 애초에 사진 기자가 아닌 사진작가일 것이라는 필자의 말을 따르자면 이 논쟁이 커지면 커질수록 반가워할 쪽이 명확해지는 이슈였다.
때로는 구구절절하게 보태는 말보다 사진 한 장이 주는 충격과 임팩트가 클 때가 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고 깔끔하게 보여주는 사진. 잘 찍힌 사진이란 그런 것 같다. 때문에 ‘사실’ 보도가 목적인 사진이 무슨 의도로 찍혔는지 그 의중을 잘 알 수 없거나 헷갈려지는 순간 그 사진은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필자의 말처럼, 사진이 디지털화되어 오면서 회화적 성격을 띠었고 그 과정에서 사전적 정의로서 사진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 퍽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날 그림이 아닌 사진을 보면서도 이게 무엇을 위해 찍힌 것인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의도가 숨겨진 것인지 상상하고 분석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을 마주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