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김진영, '찬란함을 기억하는 법'을 읽고
오늘 아침의 날씨와 같은 찬란함, 사랑의 찬란함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건 소유욕이 아니다. 그건 햇빛을 못 이겨 날개를 푸덕이는 새들처럼 자기도 모르게 그늘을 찾게 만드는 부끄러움이다. 사랑의 환희 앞에서, 찬란하고 투명한 빛의 충만함 앞에서 더는 숨길 수 없는 누추했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때 우리는 새들처럼 그늘로 숨어들어 거기에 둥지를 튼다. 그리고 모든 절정의 찰나처럼 한순간 빛나고 사라질 덧없는 찬란함은 그 둥지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온전히 간직된다.
본문 中
필자와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날씨든, 사랑이든, 그 찬란함을 깨달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묻어 있는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고 들여다보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즉, 필연적으로 빛과 어둠이 존재하는, 세상의 양면성을 잘 이해하는 태도. 이를 통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체득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한 단계 더 성장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칼럼을 통해 누군가 이야기했던 사랑의 정의가 떠올랐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명확한 차이를 설명하면서 좋아하는 데에는 '그래서'가 동반되지만 사랑하는 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동반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이유와 명목이 필요한 일과 이해와 희생이 필요한 일은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다르다.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시작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전자는 내가 보고 싶은 면만 보며 그 외의 것들은 애써 피하려 하는 저자세의 태도인 반면 후자는 보고 싶은 면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그 외의 것들 또한 면밀히 들여다보려 하는 적극적인 태도.
둘 중 어떤 사람이 빛과 그늘의 존재 원리를 더 정확히 할 수 있을까. 그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