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싸한 미사여구 하나 없지만 반짝거리는 청춘의 모습을 그린 책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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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이유는 나처럼 초대장을 받지 못한 동료들을 위해서다. 치열한 입시 경쟁과 취업난으로 마음속에 천불이 가득한 비주류 90년대생으로서, 모범적이고 바르게 사회생활을 했다고 자부할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사회에 뿌리내리는 방법도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p7)
대학생 때까지는 좋은 운동화를 신어야만 경주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맨발로 가면 입장권도 안 주는 줄 알았다. 경주에 가까스로 참여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할 거라고 생각하며 겁먹었다. 그런데 입장권을 안 주면 한켠에서 나만의 트랙을 만들어서 뛰면 된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옆은 보지말고 앞만 보고 뛰면 그만이다. (p56)
"나도 너 나이 때 일해봐서 아는데 그때 아니면 그렇게 못해"
이처럼 영양가 없는 문장이 또 있을까. 아무런 해결책도 없고 위로도 안 된다. 이 래퍼토리에서 조언을 하지 않고 대화를 마무리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아무 말 없이 달달한 커피 기프티콘을 보내는 것이다. 비싼 것도 필요 없다. 딱 5천 원짜리면 된다. (p152)
내 성과의 기준은 행복과 즐거움에 있다. 지금 하는 일 덕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가 내 성과 지표다. 지금은 문명특급을 만들면서 충분히 즐겁게 일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성과를 달성한 거다. 만약 PD를 그만두게 된다면 그때는 이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을 때일 것이다. (p153)
구독자 188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 오늘날 MZ세대라 불리는 이들이라면 모르는 이 없을 이 채널은 SBS에서 운영하는 웹예능이자 '연반인(연예인과 일반인을 합한 말로 연예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반인이라 하기에는 화제성과 인지도가 있는 사람을 두고 쓰는 말이다)'으로 유명해진 재재가 속해 있는 곳이다. 아이돌이면 아이돌, 배우면 배우, 모두 다른 곳에선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입담과 모습들을 다뤄온 곳으로 유명한데 이는 패널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가득한 MC 재재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뒤에서 <문명특급>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저자 홍민지 PD의 역할이 크다.
지금은 SBS 독립채널이 된 <문명특급>은 원래는 본사 뉴미디어팀 '스브스뉴스'에서 성장했다. 지금만 해도 오랫동안 공고했던 지상파 채널의 영향력을 넘어 뉴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홍민지 PD가 스브스뉴스 소속이 되어 재재가 함께 이 프로그램을 막 시작했을 2017년도 무렵에는 프로그램에도 메이저와 마이너가 분명히 나눠져 있었다. 같은 이름을 내세운 계열일지언정 SBS는 SBS, 스브스뉴스는 스브스뉴스대로 정말 '뉴'미디어팀이었다는 거다. 당시 이들은 기대와 희망찬 말은커녕 프로그램의 불안정성에 대한 우려의 말을 들으며 독립적인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틀에 박힌 방송들은 물론이고 유튜브에서도 여느 뉴미디어보다 차별성과 경쟁력을 갖춘 채널이 되었다. 홍민지 PD는 뉴미디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자 만드는 사람으로서 오늘날 웹 예능의 바람직한 방향성들을 보여 왔다. 이 과정에서 그가 경험한 사회의 쓴맛, 단맛, 매운맛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지금의 문명특급 PD가 되기까지 그의 삶은 생각보다 더 쉽지 않았다. <문명특급>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 내 삶은 완전히 끝난 것 아니냐고 하며 낙담했던 경험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대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 첫 번째 꿈이 되었던 애니메이터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흥미와 적성 둘 다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포기했을 때, 두 번째 꿈이었던 광고인이 되겠다며 최종면접까지 갔으나 결국 좌절되었을 때, 메이저 지상파의 예능 PD의 최종면접 또한 실패로 끝났을 때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는 좌절은 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잘하는 것을 하면 돼"라는 태연한 한마디에 괜히 배신감이 들고 위축된다면, 나처럼 못하는 것부터 지워가며 최악을 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라고 하는 책 속 그의 말마따나 그는 애니메이션도, 광고도, 지상파 예능 PD도 아니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앞선 좌절들은 꼭 거쳐야 했던 경험의 과정들이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약 6년 후 90년대생 팀장이 된 이제는 젊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많은 도전을 하고 있다. 저자는 여전히 매 순간 좌절하고 힘들지언정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법, 대신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 됐든 잘 해내야겠다는 프로의식을 익히는 중이다. 그에게 프로의식은 1년, 2년 너무 멀리 내다보기보다 3개월, 6개월씩 단기적인 목표를 잡아 내가, 우리가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만큼 일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자막 하나 대충, 연예인 섭외로 대충 우려먹기로 대충 넘길 수 있는 일들은 할 수 없는 태도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답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는 무엇 하나 쉽게 정의 내리지 않고 결론짓지 않는 태도로 자신의 삶을 좇았고 또 살아왔기 때문이다. 일종의 비포장 도로 같은 길을 애써 갈고 메우려 하지 않는 대신 울퉁불퉁하면 울퉁불퉁한 대로 경사 지면 경사 진대로 넘어온 게 그의 인생 정통법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답은 없을지언정 길은 보이게 될 것이라 믿는다. 주어진 길보다 주어질 길이 더 기대되는 이들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줌의 용기와 힘이 될 수 있는 책이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어떻게 살아야 나답게 살 수 있는 건지 이리저리 방황하며 헤매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