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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캐럴라인 냅,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 』리뷰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는 ‘거식증’이라는 개념을 개인 차원의 문제에서 확장해 이 시대 여성이 겪는 보편적인 허기와 결핍 증상으로 해석하며 사회적인 차원에서 고찰한 책이다. 저자 캐럴라인 냅은 오랜 시간 굳어진 여성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압박, 통제, 감시 등의 사례들을 분석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이어져 온 여성 문제의 본질을 파헤친다. 이러한 경험적 접근과 해체를 통해 그동안 실체 없이 존재해 온 여성 욕구의 진실을 드러낸다.      

결국 모든 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프랑스 문학가 ‘아니 에르노’가 말한 "언어화할 수 없는 체험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여성의 현실을 억압한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무언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다. 나의 상태와 행위에 대한 명확한 진단, 그리고 그것이 일상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데에서 오는 확신이 따르기 때문이다. 여성의 욕구는 지난날 이런 범주에서 줄곧 배제되었다. 여기에는 특히 광고나 미디어 같은 대중문화를 비롯해 가정 등 사적인 영역에서 끊임없이 구축된 ‘모범적인 여성상’의 이미지가 한몫했다. 외부의 세계에서 규정되던 여성의 자아 이미지는 그들의 욕구를 더더욱 피상적이고 폐쇄적이며 단순화된 개념으로만 존재하게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여성이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억압의 양상들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다. 책에서는 나이, 학력, 직업을 불문하고 다양한 여성이 어머니에게서 복합적인 감정들을 느낀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개인의 직업 및 학업적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도전 의식과 더불어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사랑에 기반하여 공존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오늘날 여전히 많은 여성이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지만 끝내는 또 완전히 별개의 삶을 살 수 없어 반복되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통찰력은 시대를 초월한다. 생각해 보면 부자 관계에 관해 고찰하는 미디어들은 보기 힘든 반면 모녀의 관계에 대해 다루는 각종 TV 상담소나 심리학책 등은 쉽게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나 또한 가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어딘가 꽉 막혀 있으나,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칠 때가 있다.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며 또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공통분모가 있는 삶을 공유하는 존재.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약 30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존재하고, 이러한 사실은 같은 여성의 범주에 속한다고 한들 서로가 다른 사회,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고 이야기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차이에 의해 엄마는 무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나에게 주기도 했고,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딜레마를 경험해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쯤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의 경험이 곧 저자의 경험이기에 이 책에 실질적인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외에도 여성의 음식과 육체를 대하는 태도, 사회적 시선에 대한 두려움, 외모 강박, 물질적 쾌락 등과 관련하여 욕구에 관한 이야기를 노골적이면서도 담백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여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삶을 회피하지 않을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직면하게 한다는 것이다. 직면한다는 건 곧 용기이고, 용기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에서 이 책은 여성이 암울하거나 자조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그것만으로 큰 동기부여를 전한다.


나아가 저자는 실질적인 해결책으로 일상에서의 실천들을 제시한다. 지난날 식욕을 시작으로 여성이 습관적으로 자기 신체에, 사회적으로 충분히 용납할 수 있는 행위에, 타인에 대한 불필요한 친절과 의식에 가졌던 지나친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세계로부터 학습된 여성의 정체성 그리고 그 안에서 파편화된 욕구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체로서 내가 경험하고 몰입할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고, 또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저녁 무렵 붉은 노을에 시선을 멈추고 풍경을 느끼는 일, 한강을 함께 산책하는 개의 존재에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일, 또한 내 아이의 끼니와 안전을 신경 쓰며 기쁨을 만끽하는 일 등이 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꾸준히 내면화하라는 것이다. 그게 크든 작든, 내적 허기가 몰려올 때마다 이를 분산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 둬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과정들을 통해 저자는 그동안 이야기되지 못했던, 욕구를 둘러싼 여성의 현실을 언어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이 하나 있다면 이 책이 거식증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여성 문제라는 사회적인 차원으로 가져와 다룬 한편 해결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페미니즘을 통해 설명됐던 만큼, 또 현대에 새로운 세대 정체성에 의해 페미니즘 물결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이러한 배경들을 토대로 한 방향성 또한 논의되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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