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눈꺼풀 고찰에서 시작된 나의 새로운 습관
요즘 들어 대화 자리에서 생겨난 습관 같은 게 있다. 나와 사선으로 앉은 사람과 대화를 할 때면 비스듬히 내려앉는 그 사람의 눈꺼풀을 내 눈에 담는 일이다. 그 순간에 상대방이 내게 미처 다 말하지 못한 혹은 말하지 않은 것들이 보이는데, 알게 모르게 벅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나는 언제부터 상대방의 눈이 아닌 눈꺼풀을 유심히 보는 사람이 되었는가.
우리 집은 금요일마다 가족 간의 소통과 화합을 빙자한 술자리를 갖는다. 큰일이 없으면 그동안 꼬박꼬박 지켜졌던 암묵적인 룰이다. 우리 가족은 다섯 명인 까닭에, 식탁이 작지는 않아도 각자 여유롭게 앉으려면 누군가 한 명은 식탁 가장자리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아야 한다. 한마디로 구조상 각각의 자리를 관장하는 중앙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 자리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 술을 먹을 때면 늘 내가 그 자리에 앉았다. 나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가족들이 앉고 나는 의도치 않게 주로 가족들의 옆모습을 보게 된다. 특히 오른쪽 동체 시력이 발달한 나로서 자연스레 오른쪽에 앉는 아빠의 옆모습을 보던 때가 많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하루를 48시간도 아닌 72시간처럼 사는 데 익숙한 아빠. 아빠가 지나온 시간의 무게는 어느새 아빠의 눈에 다 쌓여 있었다. 나는 아빠를 닮아 두꺼운 눈두덩이를 가졌는데, 그런 아빠의 눈두덩이는 이제 얇아져 몇 겹의 주름이 생겼다.
원래는 과묵한 편에 가까웠던 아빠는 '남자는 나이 들수록 여성 호르몬이 발달한다'라는 이론에 따른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말이 많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사는 일의 어려움과 잘살기 위한 태도, 그리고 기본을 지키는 일 등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과장해서 한 스무 번은 더 들은 듯한 아빠의 인생 이야기를, 그의 사선에 놓인 자리에서 듣다 보니 얇아진 채로 겹겹이 쌓여서 늘어난 눈꺼풀들이 그의 이야기와 맥락을 함께했다. 덜 무거운 이야기를 할 때 아빠의 눈꺼풀은 반듯했고 더 무거운 이야기를 할 때 아빠의 눈꺼풀은 한없이 아래를 향해 처졌다. 가끔은 그러고서 몇 초간 멈춰 있기도 했다.
사실 아빠가 술을 마시며 우리에게 털어놓는 감정과 이야기들은 실질적으로 그가 경험하고 느낀 어려움들의 1/10도 안 될 것이라는 걸 안다. 거르고, 거르고, 또 걸러서 '이 정도면 가볍게 털어놓을 수 있겠다' 싶은 마음으로 하는 이야기들일 테니까.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인생의 궤적 안에서 지금 아빠의 감정이, 생각이 온전히 어떤 상태인지 나는 감히 추측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런 아빠의 눈꺼풀을 보고 있자면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빠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오면서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눈꺼풀은 마음의 무게와 온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때로는 정면을 보지 않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를 끝마칠 때, 그리고 끝마침과 함께 침묵이 올 때 측면에서만 볼 수 있는 게 눈커풀에 있다. 눈꺼풀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자주 눈꺼풀을 보는 사람이 되었다. 누가 됐든 그 사람이 차마 다 하지 못한 말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