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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만국 공통 사랑의 언어

나간 김에 맛있는 거 먹고 오라는 엄마의 마음


선천적으로 생각이 많고 예민한 탓에 달고 사는 편두통, 어깨와 목 뭉침,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불면증까지, 그럴 때면 컨디션 회복 차 단골 한의원으로 향한다. 집 바로 앞 한의원을 두고 한 시간 거리의 성수까지 한의원을 가는 게 귀차니즘 최적화 인간인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랜만에 나간 김에 건강도 챙기고 근처에서 밥과 커피를 먹을 예정이었다.


한의원에 가기 전날 밤, 소파에 누워 엄마에게 일정을 알렸다.


"엄마, 나 내일도 일찍 성수동 한의원에 좀 갔다 오려고."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간 김에 점심으로 맛있는 거 사 먹고 카페 가서 커피도 사 먹으면서 시간 보내다 와~"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거리가 가깝든, 멀든 내가 어디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 온다고 하면 항상 나간 김에 맛있는 거 사 먹고 들어오라고 했다. 평소에 본격적으로 놀 때 빼고는 잘 나가려 하지 않는 나의 집순이적인 면모를 잘 알기에,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자주 감정적 환기를 해줘야 하는 내 성격 때문에 권하는 말일 것이다. 엄마는 이렇듯 취약한 큰딸래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 생각해 보면 몇 십 년 동안 너무 당연하게 들어온 말이었다. 이번에는 엄마의 그 말이 왜인지 새롭게 다가온 것을 보면 말이다.

 

퇴사를 하고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며, 자기소개며, 포트폴리오며 열심히 밥상은 다 차려놨는데 생각했던 만큼 공고가 올라오지 않아 수요 없는 공급만 넘쳐 나는 중이다. 그래서 당장 준비는 되었다 하더라도 기다림의 불안정성에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빠지고 지치는 날들이었다. 되도록이면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다 쓰기 전에 마땅한 소비를 위한 경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옆에서 보는 엄마는, 말은 안 하겠지만 분명 나만큼이나 어려운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나간 김에 맛있는 것 좀 사 먹고 오라는 엄마의 말이 그날은 더욱 특별하게 들렸던 것 같다. 아직 백수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딸에게, 그동안 돈 아껴 쓰라는 말은 해도 먹을 거에서만큼은 언제나 독려해 줬던 엄마이다.


자주 사랑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왔다. 물론 가족, 친구, 애인, 조금씩 다른 애착 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사랑의 유형과 방식 또한 조금씩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다른 지점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매개체가 있다. 그건 '밥'이다. 한 방송에서 아이유가 사랑을 두고 '그 사람이 잘 잤으면 하는 것'이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으로 그 사람이 맛있는 걸, 잘 먹고 다녔으면 하는 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엄마와 할머니가 틈만 나면 밥은 먹었는지, 뭐 먹었는지,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등을 챙기는 것 역시 밥이란 사랑의 대표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기약 없는 준비와 기다림으로 지치기는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생존과 끼니를 걱정해 주는 엄마가 있어, 그의 사랑이 있어 어쩐지 버틸 만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용문 태생의 엄마. 이제는 하천뷰를 앞에 둔 큰 카페 부근이 어릴 적 엄마의 집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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