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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는 세계

노키즈존을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


내게는 내년이면 7살이 되는 조카가 한 명 있다. 조카는 어릴 때부터 나를 비롯한 그의 이모와 삼촌, 고모, 이모할머니인 우리 엄마까지, 조카는 오랜 시간 어른들과 함께 커왔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와 어울리길 잘했다. 친척 언니에게 듣자 하니 가끔 언니에게 카페에 가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고, 형부와 술 한잔 먹는 언니의 옆에서 술을 더 마시지 않는 거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고. 가끔 우리 집에 올 때면 좋아하는 카드를 잔뜩 모아둔 앨범과 각종 로봇을 챙겨와 “내가 보여줄 게 있어. 다들 이것 좀 봐줘” 하고 펼쳐 놓는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른으로 둘러싸일 때가 많은 우리의 만남에서 그는 늘 자기가 가진 것들을 너무나 당당히, 그리고 멋지게 꺼내 보일 줄 아는 아이였다. 누구 하나 ‘어른들과 함께 지내는 법’에 대해 그에게 일장 연설을 해준 적도 없는데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아이라는 세계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조카는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사회적 유대’를 체득한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아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보고 배운다. 그들이 크면서 떠올리게 될 어른의 이미지가 곧 그들 옆의 우리가 된다. 가장 가까운 알에서 깨어난 새가 처음 본 사람을 그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따라다니고 모방하는 것처럼.


요즘 그 불씨가 꺼지지 않는 ‘노키즈존’에 대한 담론이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세상의 이치가, 개는 짖어야 개이고 아기는 울어야 아기이며 아이는 아직은 상황을 봐가면서 행동할 줄 몰라야 아이이다. 즐거울 때 소리 지르고, 마음에 안 들 때 짜증을 부릴 수도 있는 게 아이이다. 문제는 아이 옆에 어떤 어른이 있고, 그 어른이 어떻게 행동하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하기에 앞서 이상적인 아이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규정하고, 이에 따라 명명하기에 앞서 나는,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어떤 어른이 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아이의 세계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촘촘하다.


이 글의 주인공. 멀쩡히 길을 걷다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며 형부에게 업혔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살이 찌는데 보통 무거울 게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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