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 대한 단상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을, 눈 오는 날보다는 비 오는 날이 좋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여기에 흐리기까지 한 날씨면, 그 날이 곧 행복한 날이나 다름이 없다. 남들은 '비가 와서 쳐진다', '우울하다' 등의 말을 내뱉으며 다시 해가 뜨기만을 기다릴 때 나는 평소보다 유난히 좋은 컨디션으로,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내고는 한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사실은 유년시절만 해도 온 세상을 뒤덮어버리는 눈이 좋았다. 동글동글한 모양새가 어딘가 어린 나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줬으니까. 그만큼 그 때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많았던 것 같다. 눈은 그 자체로 순수함과 낭만성을 대표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눈보다 비를 더 좋아하게 된 시점이라고 한다면 어린 시절 품었던 세상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기 시작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눈 덮여있는 새하얀 모습만은 아니라는 것, 기대가 크면 행복하다는 사실보다는 실망이 더 크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면서 말이다. 그렇게 세상의 이면을 알아갈 때 즈음 비는 눈보다 나에게 가까워졌다. 거기다 유리와 쿠크다스의 강도 그 사이에 놓인, 취약하디 취약한 나의 멘탈에 우는 날이 부쩍 많아지고는 했는데 그 때마다 들리던 빗소리는 위로나 다름이 없었다


비가 세차게 오는 날엔 우산 없이 비 맞는 것을 좋아하고 카페에 가서 하릴없이 앉아 있는 것도 좋아한다. 또한 방 안에 누워 불을 다 끈 채, 빗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한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뿐이지만 그럼에도 전혀 외롭지 않은 느낌이 들지 않아 좋다. 비가 오는 모양새와 그것의 소리를 가만히 감상하고 있자면 나의 취약함과 슬픔을 모두 거둬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겨울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와도 같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비 오는 날 술을 마시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어딘가 쓸쓸한 구석을 안고 있는 비와 술의 관계성은 매우 바람직하달까. ) 나의 작가 프로필에도 쓰여 있듯이 나는 비 오는 날과 비 오는 날 마시는 술에 취약한 사람이다.

일종의 인생 빅 픽처랄까.


이자카야, 포장마차, 맥주창고 - 막걸리, 소주, 맥주 혹은 소맥, 주종과 공간 상관없이 비 오는 날이면 뭐에든 취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장르의 노래에 꽂히면 그 노래가 일상의 BGM이 되는 것처럼 비는 그 자체로 술자리의 BGM이 된다. (그렇다면 빗소리를 따라 대화하는 사람들은 뮤지션일까?라는 생각에 사뭇 진지해진다.) '비+술+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인생의 집약체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종종 한다. 그러니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내 인생이 비 오는 날 좋은 사람들과 갖는 술자리만큼만 풍요롭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비 오는날성애자의 비 오는 날 추천 음악

(매우 주관적인 추천입니다만, 객관적으로 좋은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Cayman Islands - The kings of Convenience
♬이승훈 - 비 오는 거리
♬정승환 - 비가 온다
♬이소라 - 신청곡
♬폴 킴(Paul Kim) - 비
♬검정치마- 나랑 아니면
♬Fugees - Killing me softly
(Joshep Vincent님의 커버곡이 상당히 좋음)
♬Robert De Boron - Hydrangea After the rain
♬브라운아이드소울 - 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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