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가 본 건 팀워크였다
<썬더볼츠*>를 예매할 때, 나를 이끈 건 한 줄의 문구였다.
“초능력 없음, 히어로 없음, 포기도 없음!”
마치 어벤져스의 각자 자리를 따라한 듯한, 조금은 어설픈 코스프레 모임이 연상됐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건 윈터솔져였다. 이미 어벤져스 시리즈와 독립 영화에서도 여러 번 등장했던 그가 또다시 나온다는 건, 혹시 이 팀이 초능력이 없는 인물들을 잇는 새로운 연결고리가 되려는 걸까? 괜한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작 장면에서 옐레나는 블랙 위도우의 동생쯤 되는 인물처럼 보였다. 액션 장면은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그런데 미션을 진행하는 과정은 비밀요원 치고 왠지 부족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영웅이라기보다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악당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자존감도 낮았고, 목표보다는 의뢰를 맡아 그걸 해내는 것만이 전부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 앞에, 일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오던 찰나에 발렌티나가 등장한다. 어벤져스가 잠잠해진 지금, 즉 그 이후의 시간을 배경으로 등장한 그녀는 진보적인 여성상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힘을 가진 자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일들이 청렴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시작을 위해선 과거를 지워야만 했다.
그래서 결국,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증거들을 없애기로 한다. 그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살아 있는 증거’, 바로 의뢰를 수행한 악당들이자 심부름꾼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서로를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각자의 목표를 안고 싸우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었다. 서로를 겨누고 죽이려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을 조종하던 자인 발렌티나에게 모두가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깨달을 때, 모두의 목표는 하나로 모아진다. 바로 ‘지금 여기서 살아서 나가는 것’. 이유도, 여유도 없었지만 그들은 그 틈에서 손을 잡는다. 함께 싸우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어느새 ‘동료’가 되었다.
처음엔 뚝딱거리는, 어딘가 어설픈 사람들의 모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각자의 장점이 모여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보다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어벤져스를 볼 때는 각 영웅의 매력에 흠뻑 빠지곤 했고, 그들이 서로 부딪히며 하나의 목표를 완성해 가는 모습이 멋졌다. 때로는 희생의 순간이 안타깝기도 했다. (특히 내 아이언맨은……)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동안 좋은 일을 해본 적은 없는 ‘악당’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며 단순한 악당이라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 각자 어두운 면을 다른 방식으로 견디고 있던, 사연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악당’이 아니라 ‘악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레드 가디언은 인상 깊었다. 진짜 영웅처럼 끓어 넘치는 열정과 자신감이 있었고, 그게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가 이 팀을 하나로 잇게 만든 핵심 인물이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사연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 “썬더볼츠”라는 이름을 명확하게 새겨주었고, 그 이름에 어쩌면 처음으로 진짜 의미를 부여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시작과 콘셉트는 분명 좋았다. 어벤져스처럼 초능력을 지닌 인물은 없었지만, 서로를 도우며 힘을 합치는 모습 속에서 ‘정말 이들이 새로운 영웅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찬 미래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즈음, 어벤져스보다도 훨씬 강력한 존재 ‘밥’이 등장하면서 모든 에너지가 빠져버린다. 그 모두가 힘을 합쳐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그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결국 밥 앞에서 이들은 단지 ‘악당 출연자’에 불과했고, “애초에 우리는 영웅이었던 적이 없잖아”라는 자책 속에서 하나둘 흩어지려는 분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힘을 지닌 밥조차도, 정작 자신의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고, 그런 생각은 쉽게 바뀌지도 않았다. 겉으론 위협적이지만, 사실은 영웅이 되기엔 마음의 그릇이 작았던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점점 더 무너져 갔다. 결국 밥은 목표도 없이, 그저 자신을 방해하는 이들을 어디에 있든 그림자로 만들며 사라지게 한다. 누구의 외침도 듣지 않고, 혼자라는 사실과 지워지지 않는 공허함 속에서 그저 조용히 포기한 채 어둠 속에 몸을 묻는다.
모두가 그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칠 때, 옐레나는 과거 밥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눴던 ‘외로움’, ‘공허함’, ‘혼자’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녀는 사라지는 것, 즉 어둠이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덮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느끼고는 ‘진짜 밥’을 찾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 장면은, 앞서 보여주었던 액션과 코미디의 팀플레이를 기대하던 내게는 조금 애매하게 다가왔다. 어쨌든 결론은 “이들이 새로운 어벤져스야!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잖아!”라고 급히 마무리하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윈터솔져의 존재감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점도 아쉬웠다. 그는 분명히 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발휘되거나 부각되지 못한 채 흐릿하게 지나가버렸다.
토요일, 아무 일정도 없던 날 문득 고르게 된 영화였다. 큰 기대 없이, 그저 ‘볼 만하다’는 후기만 믿고 갔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초능력 없는 이들이 서로의 서툰 구석을 인정하며 하나로 엮이는 과정이 인상 깊었고, 각자의 과거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 팀이 되어가는 모습에서 묘한 감동도 있었다. 액션과 감정선의 균형도 나쁘지 않았고, 지루해질 타이밍에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템포도 좋았다.
마블 세계관 속, 어벤져스 이후의 시대를 여는 프롤로그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들을 진짜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 영화는 새로운 영웅들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서사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