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3일의 일기
주말에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런데 요즘엔 이 시간을 어쩐지 잘 쓰지 못하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것저것 내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막상 오늘 내가 뭘 해야할지 생각해보면 그 무엇도 당장 오늘 할 필요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게으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전에는 늦게 퇴근하면 저녁 시간이 짧아지는 게 싫어서 아침 6시에 일어나 8시까지 출근하곤 했었는데 요즘에는 일찍 퇴근해서 꼭 해야할 일도 없으니 그냥 아침에 잠이나 더 자는 편을 택하게 된다. 10시 넘어 출근해서 집에 오면 8시가 넘기 일쑤지만 저녁시간이 짧은 것도 나쁘지가 않다.
이런 증상(평소 내 모습과 달라서 증상이라 하겠다)을 느낀지 한달 정도 된 것 같다. 시기마다 무언가에 몰두해있곤 했거나 혼자만의 프로젝트로 바빴는데 요즘은 왜 이리도 느긋하다 못해 의욕이 안 나는지 모르겠더라. 내 시간이 날 때 뭔가를 가열차게 해나가던 의욕이 사라지니 설명하기 힘든 무료함과 결핍을 느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을 좀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정체되어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력과 자극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근 1년간 발길을 끊었던 이런저런 소모임 모집글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주식 투자 모임, 한때 즐겼던 독서모임 등등. 그렇게 해서 한 주식 투자 스터디에 참여해보았고, 시장을 읽고 예측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에 관심 갖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모임에 지속적으로 나와서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면 나도 다시금 열의를 살려 시장이슈에 관심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퇴근 후 경제 뉴스를 보며 그야말로 공부하는 느낌이라 참 재미는 없었다. 우려한 대로, 그 다음주가 되니 나는 도무지 주식투자모임에 갈 맘이 내키지 않았고 그래서 안 갔다. 독서모임에도 가보려 했으나 계속 참여인원이 빠르게 마감되는 통에 한 번도 못 갔고 그마저도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모임 자체가 중단되었다. 코로나 확산세가 계속 심해져서 이번 주부터는 심지어 거리두기 2단계에 들어선다고 하니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는 건 글렀다. 하지만 딱히 아쉽지는 않다.
원인 모를 결핍은 계속되었다. 지난주에만 해도 원인이 일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요즘 들어 다시 일하는 게 재미가 없고, 회사에서 내가 딱히 역할하고 있다는 효능감이 들지 않았는데 그게 알게모르게 나를 처지게 하는 거라고. 근데 이번주에는 다시 일에서 활기를 찾았고 심지어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재미가 들려서 무척 즐겁게 일했는데 여전히 어딘가 결여되어 있었다. 저녁에 딱히 누구와 놀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이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혹은 요즘들어 같이 있으면 즐거운 회사 사람들에게 저녁 번개라도 제안할까 생각했지만 하필 코로나가 심해진데다 먼저 제안하기 민망해서 그러지는 못했다.
이 무료함을 메우기 위해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딜 갈지도 모르겠고, 또 막상 혼자 여행 같은 걸 가면 별로 즐기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진 않았다. 그렇다고 함께 가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친구가 곁에 있으면 같이 갔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꼭 남자친구와 가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건 아니었다. 난 항상 친구가 꽤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카톡 목록을 들여다보니 딱히 만나자고 할 사람도 없었다. 웬만한 친구들은 최근에 귀국하고 나서 다 만났기 때문에 특별히 더 나눌 이야기도 없는데 또 만나서 뭐해. 혼자서는 적적하지만, 또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자니 마땅한 사람도 없는 거다.
예전엔 일주일에 한 두번은 약속이 꼭 있어서 섬이가 너는 친구가 왜 그렇게 많냐고 놀라워했던 것 같은데 그땐 누구를 그렇게 만났었지. 내 시간이 너무 적어지는 게 싫어서 약속이 몰리지 않게 조절해가며 남는 시간을 소중하게 보냈었는데 요즘엔 왜 내 시간을 잘 못 보내지? 주말에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가 그게 훅 줄어들면서 여유시간이 너무 많아져서일까?(하지만 그건 올해초부터 그랬는데) 올해 들어 코로나 때문에 주로 집에 있다보니 혼자 카페에 가는 취미도 사라져서 집에만 있다보니 나태해지고, 그렇게 나태해지다보니 무력함에 빠진 것일까? 밖에 나가야 좀 더 에너지가 날 텐데 약속 있을 때를 빼곤 좀처럼 나가지를 않아서 무료함을 느끼나?
섬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자 섬이는 자기가 아는 내 친구의 이름을 대며 이 친구를 만나는 건 어때? 이 친구를 만나는 건 어때? 제안하기도 하고 이전에 돈 아끼느라 하지 않았던 염색을 하는 건 어떠냐고도 제안했지만 요즘은 염색하고 싶은 맘도 없어졌다고 했다. 무료함에 어쩔 줄 모르면서 막상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섬이가 급기야 염려하는 얼굴로 '너 괜찮아?'라고 묻기까지 했다. 요즘 우울한 거 아니냐며. 글쎄, 이 부분에 있어선 울적하긴 하다. 하지만 또 요즘 특히 회사생활 즐겁게 하면서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데.
이번 주말에도 딱히 약속은 없었다. 집에서 이것저것 내 할 일을 한다면 더없이 좋은 주말이겠지만 요즘 주말에 집에 있으면 자꾸 잠만 자고 하는 일 없이 하루를 흘려보내게 되더라. 그래서 집에 있지 말고 뭐라도 하러 나가자고 생각했다. 요즘 절약 차원에서, 그리고 또 딱히 꾸며야할 필요도 없어서 옷도 거의 사지 않고 지냈는데 일부러라도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간 김에 조만간 여권 갱신할 때 필요할 여권 사진도 찍기로 했다. 그러고서는 카페에서 모처럼 시간을 보내려고 두툼한 책도 가방에 넣었다. 쇼핑을 하러 강남에 갈까, 여의도 IFC몰에 갈까,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갈까, 신촌에 갈까 하다가 잘 안 가던 홍대로 갔다.
그리고 홍대에 도착해서 사람이 바글바글한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아, 기분이 산뜻한 게 아니라 부쩍 외롭다. 사진관에 가서 여권용 사진을 찍고, 기다리는 동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맘에 드는 니트도 하나 샀지만 이 인파 속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았다. 저녁 때가 가까워지는데 카페에 가기 전에 어디서 맛있는 거나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김치규동을 눈여겨 보기는 했지만, 오늘은 혼자 밥 먹으면 더 울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카페는 가지 말고 그냥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과 밥을 먹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사진관 앞에 있는 식당을 보았는데 이름이 '곱도리 식당'이었다. '곱'이 들어가는 걸 보니 곱창집인가, 하고 검색을 해보니 곱창전골과 닭볶음탕을 퓨전한 것 같은 '곱도리탕'을 파는 집이다. 그런데 또 곱창은 아니고 대창이 들어간다고 한다. 대창과 닭고기. 딱 내 취향일 것 같다. 안주로 먹기에 정말 좋겠다. 혼자라도 맛볼까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2인 이상만 주문이 가능한 메뉴다. 곱도리는 다음을 기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진관에서 예쁘게 보정된 사진을 찾아왔다.
오늘 같이 곱도리탕이나 먹을 누군가 있으면 좋을 텐데, 하면서도 또 그냥 놀면서 저녁 시간을 다 보내버리긴 싫다고도 생각했다. 카페도 아직 못 갔는데 누구를 만나면 저녁 시간이 다 가버려서 오늘 하려고 했던 생산적인 일을 할 시간이 없어져버리니 그건 또 아쉬울 거야. 그리고 사실 곱돌이탕이 꼭 먹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오늘 혼자 있는 기분이 울적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슬쩍 승상에게 곱도리식당을 포스팅한 블로그 링크를 보내면서, 홍대라서 너네집하고 좀 멀지만 언제 가보자고 했다. 조금 후 답이 온 승상이 맛있어보인다고 호응한다. 승상이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어때!'하고 던져보았다. 아직 다섯시 정도라 저녁 시간 전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승상이 '고민되네'하면서 마침 나갔다와서 화장을 아직 안 지운 상태라고 한다. 그러더니 곧 오케이를 했다. 과천에서 홍대는 꽤 먼 거리인데도 갑작스런 번개에 응해준 게 고마워서 곱도리탕은 내가 사겠다고 했다.
원래 승상도 만난지 얼마 안 지났기도 하고, 딱히 더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적적함을 느끼면서도 승상을 불러낼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유난히 적적했던 그 토요일 오후에 부담 없이 만나자고 할 수 있고 실제로 나와주는 친구가 있는 것이 참 감사했다. 또 마침 서로의 일정과 기분이 맞아떨어져서 이 즉흥적인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승상을 만나기로 하고 나서 나의 울적함은 사라지고 신이 났다. 승상이 오는 동안 작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한 시간 남짓을 기다렸는데, 책은 많이 읽지도 못했고 승상과 저녁에 술 마시고 나면 더 이상 책 읽을 시간도 없겠지만 아쉬운 맘은 들지 않았다. 이번 주의 난 이런 게 필요했던 걸까. 그날 저녁 곱도리탕은 무척 맛있었고, 그날 승상이 나와 함께해줘서 큰 위안이 되었다. 언제나, 친구와 만나는 건 그저 그날 약속이 있기 때문이고 재미있는 스케줄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위안으로 다가온 적이 전에도 있었던가. 그런데 이날은 정말 그랬다. 승상에게 참 고마웠다.
그렇게 오랜만의 목적 없는 외출은 친구와의 따수운 시간으로 마무리 되었고, 심지어 밤늦게 집에 돌아온 후 섬이와 영상통화하며 영화까지 한 편 보았다. 돌아보니 더없이 알찬 토요일이 되어 만족스러웠다. 일요일인 오늘은 별 걸 하지 않고 집에서 보냈다. 저녁에야 책상 앞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중. 어제 충전이 되어서인지 오늘은 대충 보내도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원인을 알 것 같다. 바쁘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부지런히 움직여 무언가를 하지 않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다음주로, 그 다음주로 미루면서 살고 있으니 많은 시간들이 텅 빈 채 흘러간다. 중간중간 약속과 일정이 있으면 그런 시간들이 희소해지기 때문에 더 소중히 여기고 알차게 쓸 텐데, 하필 요즘 약속도 없는 거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의욕이 없어졌는가를 생각해보자면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만한 동기부여가 되는 일들이 없나보지. 내 프로젝트란 대체로 부가적이고 미래의 모호한 목표를 위한 것이다. 누군가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데드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안 해도 당장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지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계속 동기부족을 탓하며 하는 것 없이 시간들을 흘려보내다 보면 또 무료함과 적적함이 찾아올지 모르니, 이번 한 주는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내 시간을 잘 보내봐야겠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