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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웨지니 Jan 24. 2021

코로나가 나에게서 빼앗아간 것

2020년 12월 7일의 일기

올 한 해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가 많은 것을 앗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2020년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느낌'이라고 푸념하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주변에는 올해 유난히 결혼 소식도 많았고 출산 소식까지 심심찮게 들려왔다. 하필 결혼식 치르기도 힘들다는 이 시기에 자꾸만 들려오는 결혼 소식을 들으며, '코로나가 어쩌니 저쩌니해도 모두의 삶은 분주히 흘러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코로나와 함께한 나의 2020년 또한, 사실은 아주 변화무쌍하고 재미나게 흘러갔다. 굳이 말하자면 코로나 때문에 잃은 것보다는 덕을 본 케이스기도 하다. 투자금이 떨어져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던 우리 회사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를 맞아 그 혼돈의 3월에 급성장을 이루었고 그 덕분에 추가 투자 유치에 성공하여 지금까지 잘 흘러가고 있다. 좀처럼 마케팅에 흥미를 붙이지 못해 미련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스웨덴으로 가려던 나는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인 기간 동안 비로소 마케터로서 다시 태어났다. 코로나 때문에 사상초유의 전직원 재택근무를 두 달이나 했던 탓에, 여름 무렵 스웨덴에 세 달 간 머물면서 원격근무를 하겠다는(아니면 그만두겠다는) 내 제의를 우리 대표님은 제법 흔쾌히 받아들였고 나는 저 먼 스웨덴에서도 돈을 벌며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적절한 시기에 스웨덴으로의 입국금지가 풀리면서 코로나를 뚫고 스웨덴으로 건너간 나는, 무사히 언니의 결혼식에 가족 대표로 참석했고 남자친구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자가격리를 마무리하기까지 코로나에도 감염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얼마간 백수였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취업을 했든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일이라도 하면서 잘 살고 있기는 할 테지만, 지금 회사를 즐겁게 잘 다니면서 무리없이 돈도 벌고 있는 만큼 개인적으로 코로나 덕을 봤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코로나로 인해 건강과 생명을 잃거나, 큰 계획이 틀어지고 생계가 어려워진 그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에게 빼앗긴 것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작년에만 해도 내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던 아이들이다. 




작년에 나의 삶에는 세 그룹의 아이들이 있었다. 첫째는 단연코 매주 주일마다 만나던 우리 교회 유치부 아이들. 두번째는 한 달에 한 번 토요일마다 만나던 나심 아이들. 세번째는 학기가 운영 중일 때만 목요일이면 방과후에 찾아가 짧은 시간을 함께 하던 어떤 중학교 남자아이들.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살 이후로 난 교회에서 항상 유치부 선생님이었다. 스물두살에 한 차례 교회를 옮기면서 정든 아이들을 떠나 지금의 유치부에 왔고, 유치부 아이들은 항상 내 삶의 큰 부분이었다. 깊이 마음 줬던 아이들도 여덟살이 되면 예외없이 유치부를 졸업하곤 하지만, 또 새로 다섯살이 되어 유치부에 올라오는 아이들과의 만남이 내 마음을 채워준다. 


작년에 내가 담임을 맡은 다섯살배기들은 저마다 엄마, 아빠, 할머니를 찾으며 툭하면 울음을 터뜨리곤 하는 아가들이었다. 나는 그 애들을 거의 만나자마자 사랑했다. 

아가에 가까운 아이들을 처음 만난 2019년 1월에 그렸던 그림


처음에는 유치부가 낯설어 들어오자마자 앙앙 울거나 엄마 곁에서 떠나지 못하던 아이들이 점차 의젓한 모습으로 혼자서도 예배를 잘 드리게 되는 변화의 과정을 보는 건 언제나 감격스럽다. 예배시간 동안은 나를 찾아와 의존하고, 신나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조잘조잘 쏟아낼 때면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쁘다. 연초에 갓 한 살 더 먹어서 이제 여섯살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자랑하던 아이들은 여전히 아기 같기만 했지만, 해가 무르익을수록 더 말도 잘하게 되고 머리도 커서 때론 밉살스럽기도 할 거란 걸 안다. 그래도 여섯살의 우리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통째로 못 보게 될 줄이야. 2월 말에 덜컥 중단된 유치부 예배는 연중에 코로나 사태가 완화되어 예배가 재개되었을 때도 열리지 않았다. 이제 좀 괜찮다 싶어서 교회학교를 다시 열까 논의가 시작될 즘이면 어김없이 코로나가 악화되어 그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어느새 한 해가 지나 다시 겨울이 찾아왔지만, 코로나는 지금도 들불같이 번지고 있고 언제쯤 아이들과 함께 유치부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 도무지 기약이 없다. 지난 5월,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직접 그린 그림을 스티커로 만들어 아이들 집으로 보내준 것을 마지막으로는 부모님들과 연락을 나누지도 않았다. 


그 아이들은 이제 일곱살이 된다. 어른이야 1-2년 못 봐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지만 아이들은 금세 자라는데, 이렇게 만나지 못한 채 흘러가는 시간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우리반 아이들을 다시 보면 눈물 나게 반가울 것 같은데, 아이들은 날 기억하려나. 유치부 교사라는 타이틀은 여전히 달고 있지만 사실상 1년째 교사로서 하고 있는 게 없다.


우리반 아이들을 그려서 만든 스티커. 똑 닮았다!


2019년에 나는 유치부를 벗어나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고자 노력했고 시간으로 헌신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초등학생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즐겁고 특별한 토요일을 선물해주기 위해 우리가 만나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하기도 했다. 마냥 어리지 않은 중학생 남자애들은 대하기 어렵고 낯설었지만,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함께하려고 했고 마음을 주었다. 사실 내가 그 아이들의 삶에 개입하여 큰 영향을 미칠 것도 아니고, 미약한 봉사를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게 뭐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거 없을지도 모르고, 있어도 안 보인다. 그래서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으로 헌신했다. 그 아이들의 어린시절에 조건 없이 애정을 주었던 어른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린시절에 받은 그런 사랑들이 그 아이들이 사랑 많은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했다. 사무실 위치가 안 좋아서 두 번이나 환승해야 했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도 긴 편이었다. 이것저것 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늘 무언가로 바빴지만, 그 아이들을 만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내 딴에는 큰 헌신이었다. 


내 본성이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크리스찬으로서 크리스찬답게 살고 싶어서였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아가려는 마음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것이다. 그 때 나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적게 잤고 늘 바빴고 일은 재미도 없었지만, 마음은 종종 뜨겁게 부풀어오르곤 했다. 아직 어색하기만 한 중학생 남자애들을 만나러 사무실로부터 한시간 반이 넘는 먼 길을 갔던 어느날, 그 중학교 교정에 들어서면서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벅찬 감정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푸른 어둠에 덮힌 운동장과 밤하늘을 돌아보며, 가슴을 꽉 채우는 행복감에 "이러려고 살지"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막상 아이들을 만나 그다지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도 잘 없고, 특별히 보람찰 만큼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그렇게 가슴이 부풀어오르니 이상한 일이었다. 중학교 운동장에서 "이러려고 살지"를 중얼거렸던 것은 마치 그것이 내가 찾은 삶의 의미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 일에 쓰는 것이 너무나 비합리적으로 느껴질 만큼.  


세 개의 아이들 그룹 중에 가장 함께한 시간이 적고 그리 친밀하다 할 수 없던 그 아이들을 만나면서도 그랬으니, 훨씬 왕성한 교류가 있었던 나심 아이들과 유치부 아이들에게 받은 것은 더 컸다. 사랑하는 데 재능이 있지는 않아서 넘치게 사랑했다고는 못하겠으나, 내 나름대로는 부단히 노력해서 사랑했던 시간들이었다. 이미 말했듯 내가 그 애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너무 미미한 것들이라 보이지는 않아도 알게 모르게 좋은 영향을 미쳤겠거니 믿을 뿐. 하지만 아이들에게 쏟는 시간만큼 나는 분명히 받았다. 내 삶을 가득 채우는 의미, 충만하게 차오르는 벅찬 마음, 아이들에 내게 마음을 줄 때 내가 곱절로 받는 행복감. 그 모든 행위의 이유가 된 예수님과도 더욱 가까웠다.


너무 즐거웠던 작년 5월 운동회날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없다. 내 일상은 그저 내 계획과 일, 회사 동료들과 가까운 사람들로만 이루어져있다. 내 안락한 미래를 위한 계획으로만 가득 차서 예수님을 닮아가기는 커녕 예수님을 떠올리지조차 않은 채 한 주, 한 달을 잘도 살아낸다. 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해 모든 모임을 최소화하면서, 유치부 예배도 모든 봉사 활동도 전면 중단되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가끔씩 되뇌일 뿐이다. 내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던 아이들이 몽땅 사라졌는데 거짓말처럼 한 해가 무탈히도 흘러간다. 일에 재미도 붙이고, 회사 사람들과도 정이 들고, 남자친구와 특별한 시간을 만들면서 다채롭게도 흘러간다. 처음에는 이 기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모르고 코로나만 없어지면, 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언제까지고 코로나만 탓하며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건가? 


잊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주일에만 온라인 설교를 통해 듣는다. 늘 목사님은 더없이 단호하게 외치신다. 지금 내가 몰두해있는 나의 소중한 꿈과 계획, 관계까지도, 모두 반드시 하루아침에라도 사라질 것들이라고. 나의 계획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시킬 수 있는 나이지는 않은지 돌아보라고.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라고. 무언가를 희생해서 나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해서 사랑을 관철시키라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사랑하기 위해서는 '살펴보는 지혜와 다가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일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흐려져가고 내 본성은 한없이 나의 계획에만 집중한다. 다른 사람을 살펴보는 것도 어렵고, 다가서는 것은 더 어렵다. 이런 말씀을 듣고 가슴이 찔릴 때면 또한 내가 유치부 선생님을 하면서 가장 친하게 지냈고 가장 사랑했던 네 명의 어린이들이 자꾸만 생각난다. 그 애들이 다섯살일 적부터 봐왔지만 지금은 이미 모두 유치부도 졸업했고, 한때는 친했던 아이들의 엄마들과도 서서히 멀어진데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서 마주칠 일도 없으니 완전히 교류가 끊겨버린. 한때는 가슴아플 만큼 사랑했던 그 아이들이 이제 추억으로만 남았다는 게 내 말라버린 사랑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아프다. 스웨덴에 있던 어느 날 온라인으로 들은 설교 말씀이 내 마음을 울렸을 때, 그 아이들을 사랑했던 시절과 지금 내 모습의 괴리가 씁쓸하다 못해 슬퍼서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나도 내 눈물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영문 모르고 다가와 나를 위로해주는 남자친구에게 내가 우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 애들이 그리운 건지, 그 애들을 사랑하던 시절의 내가 그리운 건지. 어쩌면 그냥 지금의 내 모습이 슬픈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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