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마케터로 일한지도 2년이 넘었다. 관료적인 시스템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팀'을 찾아 몸담게 된 곳이었다. 회사라기보다는, 한 팀처럼 일할 수 있는 곳. 관료적으로 위에서 떨어지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컨펌의 사실에 매이지 않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
나의 첫 스타트업 경험에 대해 평점을 매겨보자면, 5점 만점에 4.2점 정도를 주고 싶다. 나는 우리 회사가 좋고, 신뢰와 애정을 기반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마케팅팀이 없고 마케터가 나 하나 뿐이라서 부담도 많고 아쉬움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일하며 성장할 수 있는 팀.
사실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고 사실은 일에서 만족감을 얻기까지 방황의 시간도 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마케터로서의 내 자아를 찾았고, 앞으로도 비슷한 팀 문화와 업무방식을 가진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리 회사는 작은 스타트업이다. 회사라 부르기 딱딱하니 편의상 '콩알탄'이라고 부르겠다(회사와 콩알탄은 아무 관련이 없다). 처음 들어갈 때 나를 포함해서 9명이었던 멤버는 이제 몇 명이 빠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채워져서 15명이다. 콩알탄은 소셜 앱을 서비스하고 있다.
콩알탄은 내게 좋은 일터가 되어주었다. 콩알탄은 스타트업이니만큼 대기업처럼 금전적으로 유익한 복지는 많지 않지만, 내가 콩알탄에서 누리는 가장 큰 복지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들, 존중어린 소통 방식, 유연한 시스템. 그것이 일하는 삶의 질을 매우 높여주기 때문이다.
첫째, 콩알탄에서 나는 내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직급이 없고 역할이 있을 뿐이었기에, 누구의 연차가 어떻고 선배인지 후배인지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마케터 포지션은 나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수는 있다. 나는 의사표현이 뚜렷한 편인데, 회의에서 언제나 주저 없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거나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다. 이건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도 나를 권위로 누르거나 인격적으로 손상시키지 않는다(내 첫 직장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회생활이라는 명목으로 내 자아를 깨야할 때 나는 무척이나 우울해지는데, 콩알탄에서는 내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다.
둘째, 콩알탄에서는 업무시간이 자유로웠다. 우리는 11시 전에만 출근하면 된다. 내가 한창 얼리버드였을 때는 매일 8시에 누구보다 빨리 출근해서 역시 누구보다 빠른 5시에 퇴근하기도 했다. 지하철이 붐비는 시간대가 싫었고, 저녁시간을 온전하게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면서 지각할까봐 서둘러야 했던 적은 없다. 출근시간이 9시로 정해져있는 보통의 회사에 다니던 때는 10분이라도 지각하면 큰일이었는데, 여기서는 누군가 11시보다 늦게 오더라도 별일이 아니다. 어차피 다들 각자의 때에 출근하고 퇴근하니까. 내 주변에는 스타트업 다니는 친구가 없어서 다들 이런 유연한 출퇴근 시간을 신기해하기도 하고 부러워도 하는데, 다른 스타트업 중에도 유연출퇴근제를 하는 회사가 굉장히 많더라.
셋째, 내가 하고 싶은 새로운 시도는 다 해볼 수 있었다. 터무니없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도 시도해볼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나는 새로운 것을 많이 해볼 수 있었다. 비록 같은 마케터로서 머리를 맞대고 하나 하나 논의할 수 있는 팀원은 없었지만, 다른 포지션의 팀원들은 언제고 필요한 피드백과 서포트를 해주었다. 나는 새로운 마케팅 채널에 광고를 돌리고, 처음 듣는 해외 마케팅 에이전시와 협업했으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마케팅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었고, 대학생 서포터즈를 운영했고, 일러스트레이터 외주를 써서 공식 인스타그램에 다양한 시리즈물을 연재했다. 그 외에도 콩알탄에서 처음 해본 일이 정말 많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에서 성과가 있든 없든, 누구도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실패를 겁내지 않고 콩알탄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경로의 마케팅을 시도해볼 수 있었고, 모든 것은 콩알탄의 자산이자 나의 자산으로 남았다. 스스로를 형편없는 마케터라고 생각하며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던 나는 어느새 내 역량과 경험치에 제법 자신감을 가진 마케터로 성장했다. 다 콩알탄에서 벌어진 일이다.
물론 콩알탄의 팀원들이 회사에 대해 다 나처럼 느끼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콩알탄 대표님은 푸근하고 유연한 성품을 가진 분이지만, 벽에 대고 얘기하는 듯 답정너라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콩알탄에서 워라밸 요정으로 불리며 스트레스 받지 않고 일하는 편이지만, 일이 빡세고 야근이 많다고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팀원도 있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포지션마다 다르고, 팀원 개인의 성향마다, 겪는 일마다 느끼는 바가 천차만별이다. 하물며 같은 스타트업이라도 그 회사의 문화마다, 구성원마다 또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있을 테니 스타트업은 다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스타트업 마케터로 일하는 것이 좋고 콩알탄에서 일하는 게 재밌다.
이렇게 말하면 꼭 콩알탄에 뼈를 묻을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 이건 콩알탄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다. 한 스타트업에 2년이면 이제 딱 이직을 생각할 때가 아닌가. 실제로 많은 면접을 보기도 했는데, 이직의 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음 번엔 이직 시도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