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오전 11시에는 코로나 검사 예약이 잡혀 있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모든 입국자에게 비행 72시간 이내에 검사한 음성 확인서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걸 제출 하지 않으면 내국인이라도 비행기 탑승조차 하지 못한다. 무비자로 입국한 나는 90일의 체류기간을 거의 꽉 채웠는데, 혹시라도 막판에 덜컥 양성이 떠서 스웨덴을 떠나지 못하게 될까봐 불안했다. (코로나 때문에 제때 출국을 못하면 대사관에서 어떻게 구제해줄까, 아니면 본의 아니게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리는 걸까?)
섬이와 함께 검사소 앞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예약과 상관없이 기다려야 하는 걸까 생각하며 일단 줄을 섰는데, 곧 직원이 문을 열고 나와 스웨덴어로 뭐라고 말했다. 우리 뒤편에 줄 서 있던 사람이 뭐라고 대답하자 직원이 그를 들여보냈다. 그러자 섬이가 얼른 나서서 큰 소리로 뭐라고 말했고, 그러자 우리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직원이 예약시간을 물어본 것이었고, 어떤 사람이 "11시 예약했어요"하고 바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섬이가 "우리도 11시 예약이에요!"하고 외친 거라고 한다. 혼자 왔으면 직원이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고 멀뚱히 계속 줄 서 있을 뻔했다. 현지인 보호자를 대동한다는 건 참 좋구나.
한국에서 검사할 때와 달리 면봉을 콧구멍에 넣지 않고 입에만 넣어보고는 끝났다. 고통도 없고 너무나 간단했다. 직원들이 스웨덴어로 말하면 섬이가 보호자처럼 대신 대답해주니 굳이 내가 영어로 말할 필요가 없어 편했다. 혼자 있으면 이럭저럭 알아서 했겠지만, 또 같이 있을 땐 섬이가 이렇게 해주니 든든하다. 여기 머무는 동안 섬이가 늘 앞장서서 가이드 겸 보호자 노릇하며 애써주었으니, 다음에 얘가 한국에 왔을 때 나도 잘 챙겨줘야지.
2.
무사히 음성이 나오기를 바라며 우리는 산뜻한 기분으로 마지막 데이트를 즐겼다. 먼저 점심을 먹으러 어느 쇼핑몰 건물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무지에 들어갔고, 우연히 캔버스운동화를 저렴하게 득템했다(섬이가). 내가 내려고 했던 1000kr의 코비드 검사 비용을 섬이가 이미 자기 돈으로 결제했다는 걸 알게 되어서 고마운 마음에 내가 선물했는데, 안 그래도 저렴한 운동화가 반값 할인을 하고 있어서 149kr 밖에 안 했다. 아니, 모처럼 사준 건데 너무 싸네.
점심은 하와이 포케에서 연어 포케를 먹었다. 원래 연어를 안 좋아하는 나였는데, 이번에 스웨덴에 머무는 동안 어쩐지 연어친화적이 되었다. 마지 못해 먹는 수준이던 연어 스테이크를 무척 좋아하게 된 데다, 이렇게 날연어가 들어간 음식까지 사서 먹다니. 맛은 괜찮았지만, 역시 스톡홀름이라 음식 퀄리티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쌌다. 어차피 곧 떠나는 마당이니 맘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카페에 갔다. 바로 vete-katten, 우리가 맨처음 만났던 날 가서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카페. 이 애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날을 넘어 다시 이 카페에 다시 오니 재미있는 기분이었다. 워낙 인기가 많은 카페라, 그 때처럼 주문을 하려면 카운터에 길게 늘어선 줄을 서야했다. 하지만 내부가 워낙 넓어서 자리는 많았다.
나는 얼죽아인데 이 카페는 내가 늘 마시는 아이스바닐라라떼는 커녕, 아이스 커피 자체를 팔지 않았다. 2년여 전 처음 왔을 땐, 이 낯선 외국인 남자애한테 내 까다로운 취향을 드러낼 수 없어 "그럼 따뜻한 커피도 괜찮아^^"하고 평생 입에도 댄 적 없는 따뜻한 카페 라떼 따위를 마셨지만, 이번에는 무조건 찬 거 아니면 안 마신다고 하며 스무디를 골랐다. 처음 만난 날에는 내 건 내가 산다고 해도 "아니야, 너가 우리나라에 방문한 거니까 내가 사줘야지^^"하면서 기꺼이 계산하던 섬이는, 그때 베푼 걸 이제 회수할 시간이라면서 기꺼이 날 계산대로 떠밀었다.
3.
그리고 우리는 슬슬 걸어서 어느 공원에 이르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스톡홀름에 오래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또 처음 가보는 넓은 공원이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벤치나 잔디 위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푸른 잔디가 가득한 공원을 걸으며 생각했다. 스웨덴은 발 닿는 대로 걸어도 공원과 잔디밭, 숲과 강을 수없이 만날 수 있는데, 서울은 한강을 끼고 살지 않는 이상 기분 좋게 오래 걸을 만한 산책길 하나 찾기 어렵다. 그리고 좋은 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섬이지만, 막상 모든 것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에 살면 답답해서 스웨덴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한적하고 아름다운 산책로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스웨덴살이의 장점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그것만이 내가 느끼는 스웨덴살이의 장점이었다. 그외에는 한국이 더 좋았다. 다양하고 맛있는 내 취향의 음식들, 큰 부담없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외식물가, 노래방, 쇼핑. 그리고 내 친구들과 내 삶이 있는 곳. 한국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다채롭고 즐겁다. 건물들은 예쁘지 않고, 거리는 빽빽하고 산책할 데라곤 한강 밖에 없어도.
작년에는 3개월이 지나고 한국에 돌아갈 때쯤 되니 떠나는 게 아쉬운 한편으로 한국에 가는 게 무척 신나기도 했다. 빨리 한국에서 삼겹살과 김치, 계란찜, 된장찌개를 함께 맛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지 그런 것들이 다 그립지가 않다. 한국에 가면 빨리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그다지 없다. 친구들이야 만나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만나지 못해 갈증을 느끼고 있지도 않고. 이번에는 에어비엔비에도 묵고 더 다채롭게 지내서 그런걸까. 섬이와 함께 있는 게 작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즐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웨덴은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오래 머물기엔 너무 결여된게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 체류에서는 결핍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한국에 두고온 게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고, 무엇 때문에 내가 꼭 한국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던가, 왜 나는 스웨덴에 살 수 없다고 느꼈던가 잘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스웨덴의 좋은 점인 너른 잔디공원을 보면서, 한국에 가면 섬이가 느끼게 될 결핍이 그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공원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은 이제 거의 마지막일 거다. 찬란하지만 짧은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바람이 쌀쌀해서 재채기가 나올 지경이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이제 겨울이 오면, 이 잔디들도 황량해지고 눈에 덮여 보기 힘들어지겠지. 해가 짧아서 사람들은 집에서 어둑한 주황색 조명을 켜고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우울하고 길다고 하는 스웨덴의 겨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한국살이와 비교해서 어쩌면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 '스웨덴살이'란,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서 일년의 절반을 차지하는 겨울을 나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역시 내게 스웨덴살이란 한국에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지 몰라.
섬이에게 아직도 한국에 그렇게 살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섬이는 이전처럼 일관성 있고 현실적인 대답을 했다. 한국에서는 놀 거리도 많고 젊을 때 살기엔 훨씬 재밌다고 생각해서 살아보고 싶지만, 또 나이 먹어서 그렇게 놀러다니기보다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질 때엔 스웨덴이 나을 거라고도 생각한다고. 그래서 우리가 결혼하고 나이먹게 되면 스웨덴 가서 살자고 너한테 푸시할지도 모른다면서 웃었다. 서로 상이한 장점과 단점을 가진 두 나라를 비교해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외국에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나와, 한국에서 사는 게 꿈인 섬이가 만났을 때 우리가 함께 할 나라는 당연히 한국이었다. 스웨덴에 여러 번 오가면서도, 한 번도 스웨덴에 이주하여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스웨덴에 와서 몇 개월씩 지내게 되고, 점차 적응해가면서 한국의 것을 그리워하며 느끼던 결핍도 흐려진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언니가 자신의 빅픽쳐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0년 후 여기 살고 있는 너랑 바베큐 파티 해먹는 걸 상상했다고 하기에 '뭐야 누가 스웨덴 산대?'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던 게 몇 개월 전인데, 이제는 거의 내가 나중엔 스웨덴 와서 살 것이라고 기정사실화하며 올거면 빨리 와서 자리잡고 여기서 연금 쌓기 시작하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까지 한다. 아니 스웨덴 이주를 계획한 적이 없는데 무슨 연금까지 생각해서 빨리 오래... 그런데 듣다보니 또 조금씩 세뇌가 되는 건지 스웨덴에 와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언젠가 여기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앞일은 모르는 거지만, 그래 모르는 거니까.
우리는 다시 공원에서 내려와 근처의 에스프레소 커피에 들어갔다. 올여름 우리의 아지트가 되어준 좋은 카페. 사람이 적고 넓어서 우리는 좋은 소파 자리에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돌아가고 나면, 다시 만날 때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자고 의지를 다졌다. 섬이는 예전에 한국에 왔다가 돌아갈 때처럼 동기부여 에너지가 가득 충전된 상태인 것 같았다. 우리는 내년 3월에 한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건 올해의 마지막 데이트였다. 내일은 집에서 언니와 시간을 보내고, 그 다음날인 화요일 아침에 섬이가 와서 공항으로 배웅해줄 예정이다. 여전히 슬픈 기분에 휩싸이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화요일에 봐, 하면서 평소처럼 웃으며 가볍게 포옹하고 헤어졌다.
코로나 검사 결과는 별탈없이 음성이 나왔다. 휴,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을 거란 게 확실해졌으니 이제 안심이다. 지난번에는 소소하게 배탈나거나 컨디션 안 좋은 날도 좀 있었고, 섬이에게 서운한 적도 많았는데 이번 3개월은 마냥 즐겁고 건강했다. 작년엔 이래저래 투덜거리는 일도 많던 섬이가 올해는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또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언니와도 작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다정한 가족이 되어준 담담이 그리고 강아지 왕코와도 아주 편해졌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과연 스웨덴과 내 인연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정답은 없고, 어느 쪽이든 좋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