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주는 하루

비어있는 하루.

by 주디의 작은 방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간다.

채워 넣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하루가 될 것처럼 믿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결핍 속에서 하루가 빛을 얻는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부족함은 허전함이 아니라, 나를 잠시 멈추게 하고 귀 기울이게 하며, 다른 어떤 것들이 들어설 자리를 열어 주는 틈이다.


한때 나는 결핍이란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손에 닿지 않는 것, 끝내 가질 수 없는 것, 아무리 채워도 차오르지 않는 허기.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허전함의 그림자를 곱씹다 보니, 결핍이 꼭 비극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결핍은 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고, 아직 다 쓰이지 않은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결핍은 나를 멈추게 했고, 멈춤은 내 안의 낯선 숨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는 오늘도 어떤 것이 비어 있는 탓에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산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텅 빈 공허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다독여 주는 여백이 되었다.

채워져만 있다면 나는 아마 흐르듯이 흘려보냈을 시간들이, 결핍의 틈새 덕분에 조금은 더 천천히, 또렷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결핍은 작은 것에서 온다.
누군가에게는 사치일 수 있는 물건의 부재, 잊고 지나간 대화 한 토막, 문득 그리워진 온기의 부재.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때로는 깊은 흔적을 남긴다.

커피잔을 비워 둔 채로 창밖을 오래 바라보다가, 그 빈 잔에서 오히려 위안을 얻는 순간이 있다.

비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오히려 자유롭게 한다.

채워진 책장은 보기에는 든든하지만, 빈칸 하나 없는 빽빽한 문장처럼 답답하기도 하다.

반대로, 몇 권의 책이 빠져나간 흔적이 있는 책장은 그 공백 덕분에 시선이 머물고, 어떤 책이 있었을까 상상하게 한다. 내 삶도 그렇다.

모두가 가득 채워진 듯 보이는 순간보다, 빠져 있는 무엇이 있어 자꾸만 생각이 머물고, 마음이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훨씬 더 따뜻하다.


나는 종종 결핍을 꽃에 비유한다. 피어난 꽃보다 꽃잎이 지고 난 뒤의 빈 줄기를 오래 바라본다.

꽃이 사라진 자리는 허전하지만, 그 허전함 속에서 꽃이 한때 피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결핍은 그렇게 기억을 선명하게 한다. 가득한 것보다 비어 있는 것이 더 오래 남는 순간이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사랑이든, 건강이든, 혹은 마음 한쪽에서 사라진 희망이든.


우리는 그것을 감추려 애쓰고, 채워 넣으려 애쓰지만, 어쩌면 그 결핍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인지 모른다.

결핍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더 둔감했을 것이다.

어떤 음악이 이토록 가슴을 울리지 않았을 것이고, 시 한 구절이 눈시울을 적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족함이 있기에 마음은 더 쉽게 흔들리고,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결핍은 무뎌져 가는 일상 속에서 여전히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완벽히 충만한 삶을 산다면, 우리는 여전히 시를 읽을까?

바람에 스치는 낙엽 소리에 멈춰 서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채워진 삶에는 멈춤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핍은 우리를 멈추게 한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결을 만지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결핍이 나를 가르쳐 준 것은 ‘있음’이 아니라 ‘없음’의 힘이다.

없는 것에서 오는 자유, 비어 있음에서 비롯된 상상, 닿지 못한 곳에서 자라는 그리움.

그것들은 모두 내 삶을 풍요롭게 채워 주었다.

누군가는 채워짐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결핍 속에서 행복의 모양을 발견한다.

행복이란 결국 ‘충만’이 아니라 ‘충만하지 않아도 괜찮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결핍은 날마다 내게 묻는다. 오늘도 부족함을 견딜 수 있겠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결핍은 내 삶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니라, 오히려 빛의 반사다.

그것이 있기에 나는 빛을 더 또렷이 느낄 수 있다. 결핍이 없다면, 충만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핍과 함께 하루를 산다. 그리고 결핍 덕분에 하루를 더 온전히 산다.

채우지 못한 자리에서 나는 감사의 마음을 배우고, 가질 수 없는 것 앞에서 오히려 삶의 소중한 결을 더 깊이 느낀다.

결핍은 나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온전히 존재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부족한 채로 살아간다.

비워둔 마음에 바람이 스치고, 그 바람이 내 안의 먼지를 털어낸다.

결핍은 결코 고통만이 아니다.

그것은 내 하루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며, 나를 끊임없이 살아 있게 하는 고요한 숨결이다.

나는 결핍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충만보다 더 오래 나를 지켜줄 것이다.




by 주디의 작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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