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나는 가끔 감기에 걸린다.
일어나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누운 채로 하루를 거부한다.
말수가 줄고, 사람을 피하게 되고,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
그 감기의 이름은 ‘우울증’이다.
처음 감기에 걸린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특별히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하루가 무거웠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병원에 갔고, 약을 처방받았다.
마음 감기는 그렇게 계절별로 일상의 무게별로 내게 예고 없이 찾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마음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가서 뇌파검사를 비롯해 각종 검사를 다 받아보았다.
그리고 한 달 여 만에 검사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검사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마음 독감이 걸린 이후로 나는 한 달 동안 한 끼도 빠짐없이 한 손 가득 차게 약을 먹었다.
담당선생님이 지어주신 약을 먹지 않으면 아침 점심 저녁을 버텨내지 못했다.
밥 보다 약을 더 많이 먹고 지냈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니... 다.. 다행인가... 싶었다.
내가 너무 약해진 것 같아 창피했지만 그보다는 그냥 전처럼 아무 일 없이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고 살고 싶었다.
"우울은 감기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의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감기에 걸린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시간이 지나면 감기는 낫는다. 우울도 그렇다. 하지만 감기약처럼 몇 알 삼키고 나면 금세 괜찮아지는 건 아니다.
우울은 아주 천천히, 말없이, 조용히 물러난다. 그리고 내가 안심할 즈음, 또다시 찾아온다. 내가 허술해진 틈을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는 듯이.
그래서 나는 상상해 봤다.
우울증에도 예방주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그 상상은 나를 위로했다. 독감 예방주사처럼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증세가 심해지기 전에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그러고 보면, 내 일상 속엔 이미 작은 예방주사들이 숨어 있었다.
햇살 좋은 날엔 일부러 커튼을 활짝 연다.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날엔 노트에 몇 줄이라도 끼적인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커피를 내리고, 그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싼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한다.
"나, 요즘 좀 가라앉고 있어."
그 말 한마디가,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려는 나를 아주 살짝 끌어올린다.
예방주사는 아프다. 따끔한 통증이 있어야 면역이 생긴다고 한다.
공황이 왔던 밤, 온몸이 얼어붙고 숨이 막히던 그 순간이 내게는 그런 ‘따끔한’ 경험이었다.
그 고통을 지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나는 약하지만, 그래서 더 잘 살아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지금도 우울은 종종 나를 찾아온다. 어떤 날은 아주 슬금슬금, 어떤 날은 거센 파도처럼 들이닥친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나는 내 안에 예방주사를 준비해 두었다.
나만의 백신.
그건 누군가의 따뜻한 말일 수도 있고,
햇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산책길일 수도 있고,
익숙한 멜로디, 좋아하는 문장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그냥 두는’ 관용일지도 모른다.
우울은 또 올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전에, 내 마음에 작은 예방주사 하나쯤은 놓을 수 있다는 것을.
by 주디의 작은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