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 케이크의 미학

두 편의 글

by 수영


걸어 둔 배경음악이 있지만 이번 글은 음악과 이야기가 아니다.


재작년 여름 병영문학상 수필 부문에 제출했던 글 두 편을 올려 두고 싶었다. 한 편이 입선했지만, 병영 관련 소재를 의도적으로 넣었기에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억지로라도 군 관련 요소를 넣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인지, 군과의 연관성이 다소 부족했는지, 아니면 적당히 이런저런 요소가 참작된 결과였는지, 어떠한 평가도 듣지 못해 아쉬웠다.


아마도 한동안 또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 다시 학교로 가야 한다. 어쩌다 보니 졸업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역학, 생유기, 미적분... 이미 한참 고등학생 시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분명 인문학에 비하면 또 다른 매력이 있지만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민할 때는 이 길이 답답히 느껴질 때도 있다. 온전히 내 선택이기에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는 없다.


솔직히,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에 순전한 행복을 느끼는지, 무엇을 위해 다른 어떤 것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


그저 지금처럼 술을 멀리하고, 매일 헬스장을 가고 증명 문제를 푸는 삶이 차라리 즐거울지 모르겠다. 너무 화려한 것도, 너무 감싸 안는 것도, 너무 빛나려 하는 것도, 너무 자조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운명을 꿈꾸다 오히려 몇 년을 시들어버렸다. 그럴 만한 것을 만나지 못했으며 앞으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삶을 지탱하는 억센 자의식도 나를 먹여 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욱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이나 걱정에 하는 말이 아니라, 순전히 믿고 지지하는 일이 아니라, 정말로 나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이제는 삶을 책임질 나이가 된지 오래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어도 더욱이 얻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이 많다. 가진 사람을 향한 힐난도 무섭지만 얕보이는 사람을 향한 조롱과 멸시가 더욱 교묘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남들보다 초연하고 사려 깊거나, 혹은 긍정적인 사람이 있을 뿐, 세상에 영원한 천사를 바라는 것은 맹목일 것이다.


마음을 꽤나 정리했다. 그러니 그곳에 조금은 가까워지고 있을까.




- 곰돌이 케이크의 미학



재작년 초겨울 저녁 K와 나는 서울대입구역 근처 어느 카페에 들렀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니 선반 위에는 그가 고른 아인슈페너와 내가 고른 차가운 아메리카노, 그리고 그가 졸라서 주문한 곰돌이가 누워있는 형상의 케이크가 올라와 있었다. 늦은 저녁까지 막걸리를 마셔 조금 취기가 돈 채로 이런 대화를 했다.


“사진 좀 그만 찍어. 어차피 먹을 거잖아.”

“그래도. 얘를 어떻게 잘라서 먹을 수가 있어. 너무 귀엽잖아.”


그는 사진을 왕창 찍고서 정작 포크를 들기는 망설였다. 내가 접시 위에 올려진 칼로 몇 조각 잘라 놓은 것을 그는 한두 입 먹더니 그만두었다. 나 역시 처음부터 입맛이 없어 몇 조각을 먹고 나머지는 남겼다. 먹지 않을 테면 왜 주문하자고 했냐는 말이 목 밑에서 맴돌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보기 좋지만 먹기 싫은 곰돌이 케이크는 그에게 어떠한 의미였을까. 그가 자신의 재화와 시간을 들여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는 그날 자신의 SNS에 곰돌이 케이크 사진을 게시하지 않았다- 의문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무렵에서야 그 일을 회고했다. 그간 K와 내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눈이 쏟아 내리던 날 그와 입을 맞춘 일, 아침 일찍 그와 바다를 보러 갔던 일, 며칠 동안 그의 연락을 기다리느라 끼니를 거른 일 등, 하지만 전부 지난 일이었다. 이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기억 속 그는 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내게 가끔 며칠 짜리 고민을 던졌다. 그러고 나서 실마리를 건네준 것도 늘 그였다. 그럴 때면 나는 농담처럼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곤 했다. 그런 그의 머릿속을 더는 열람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홀로 지운 고민은 그를 잊기 위한 시간과 함께 순장되었고 다시 그곳을 찾는 일은 없을 터라고 믿었다.


K를 떠올린 것은 훈련소에서 김금희의 「마지막 이기성」을 읽으면서였다. 이는 일본 사회 내 한인 차별 문제에 관하여 '이기성'과 '유키코'의 대항 방식의 대비가 돋보이는 소설 작품이었다. 항의서를 제출하며 대학 내에서 시위운동을 일으킨 이기성과는 달리 유키코는 시위를 벌인 땅 위에 배추를 심는 방법을 택했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기보다 배추를 심음으로써 그녀의 행동은 크게 주목을 받았고 결국 이는 문제 해결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보여준 ‘배추 심기’는 독특한 저항 방식이었고, 그것은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 등 어떠한 미적 범주로 특정할 수 없는 평화로운 투쟁의 모습으로 비치었다. 그것이 반향을 불러온 결말과는 상관없이 나는 유키코에게서 K의 모습을 보았다. 이는 단순히 그가 유키코와 같은 미학도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미적 사유를 통해 모순의 성취를 이뤄내려 한 태도는 내가 우러르던 그의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반면 투쟁 혹은 순응, 그 이분법에서 나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의 흔적이 담긴 네 컷짜리 스티커 사진을 나는 관물대에서 꺼내 보았다. 귀여운 곰돌이 케이크를 바라보던 K와 그런 그를 바라보던 나의 눈은 얼마큼 닮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그것을 소유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리 없었다. 오래전에 그로부터 제롬 스톨니츠의 미적 태도 개념에 관해 전해 들은 일이 떠올랐다. 그때 K는 특히 '무관심적 주목'에 관해 설명했었다. 스톨니츠는 미적 대상이나 속성을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태도에 달린 일이고, 그것은 '실제적 지각 태도'와 구분되는 '미적 지각 태도'의 작용이라고 언급했다며 그는 말했다. 유용성을 척도로 두는 실제적 지각 태도와 달리 미적 지각 태도를 이루는 핵심은 '무관심성'이라고 했다. 그것은 대상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 아닌,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관조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K는 쇼펜하우어나 스톨니츠와 같은 미적 태도론자의 입장을 꽤 지지하는 편이었다.


반면 무용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믿어 왔던 나는 그의 말을 들을 때도 자신이 미의 객관론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는 계속해서 무용한 것을 찾아 헤맸다. 이상하리만큼 글감을 찾거나 이성과 교제할 때조차 그 대상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따지기도 했다. 쓸모를 잃은 것들의 말로를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버리거나 버림받거나- 어느 쪽도 되기 싫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K와 달리 그 무용함을 실제적으로 이용한 격이었다. 무용한 대상을 관조한다기보다는 소유하고픈 욕망이 더 크게 발현했다. 그리고 오만하게도 K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충분히 무용하다고 생각했다. K에 대한 소유욕의 발현 역시 그러한 회로를 따라 이루어졌다. 무용한 그와 함께라면 절대 그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나와 K가 이렇게 생각이 달랐음을 인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상적으로 우리는 비슷했기 때문에 더욱 알아채기 어려웠다. 나는 무용한 K를 사랑했고, K는 나를 사랑했기에 요구 없이 바라보았다.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은 매우 큰 차이였다. 그가 그렇게 순수한 눈으로 주문한 곰돌이를 바라볼 때 -이를테면 케이크를 먹어 치우려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조형에 주목해서라든지- 나는 무용하기에 아름다운 그를 소유하려는 눈빛을 보낸 것이었다. 그와 같은 관조적 태도를 익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던 나는 끝내 그와 떨어져 걸어야만 했다.


K의 생각처럼, 아름다움이란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시선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었을까.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삶의 많은 영역에서 미적 지각 태도를 견지하기에는 제약이 있었다.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은 이해관계로 엮여 있어 경쟁이나 협력 등의 성과 지향적 활동이 수반되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K는 유키코처럼 미적 지각 태도로 이해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설을 때때로 이루어냈다. 그가 기획한 프로젝트나 과제물은 늘 뛰어난 평가를 받았다. 반면 나는 아니었다. 때에 따라 관조와 집념의 스위치를 번갈아 끄고 켜야 뜻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훈련소와 자대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많이 쓰는 일과나 체력 단련은 늘 내게 괴로운 일이었고 그것을 참으면서 하기는 했어도 결코 즐겁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병영 내에서의 인간관계도 비슷했다. 앞으로 몇 개월만 더 견디자는 마음으로 수동적으로 지냈을 뿐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러한 집념은 현재를 견디기 위한 어떠한 실제적 태도일 뿐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작금의 생활 속에서 어떠한 종류의 미를 획득할 수 있을까. 집념의 불씨는 화마로 번지기 쉽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기에 이러한 태도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견딤의 방식에서 일말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아닌, 이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어떠한 새로운 방식이나 태도를 지니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우리나라는 전쟁을 마치지 않은 상태이고 그렇기에 나라의 부름을 받아 온 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내 모습이 마치 여느 전후 소설에서 드러나듯 실존적 불안감, 허무함과 무력감을 얼마큼 껴안은 형상인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러한 태도로 비관하기만 한다면 내게 좋을 것이 없었다. 근래 그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자꾸 K를 떠올렸다. 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그가 지금 내 곁에 있었다면 언제나처럼 실마리를 주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K의 마음을 생각했다. 그가 요구나 목적 없이 바라보았던 나를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진실한 이유는 자기 계발을 하기 위해서나 인간관계를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몸을 쓰고 훈련을 하고 체력 단련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당위로 온 것이었다. 그 당위란 내가 그간 누리고 앞으로도 누릴 자유에 대한 대가이자 이 나라를 지켜 온 사람들의 정신을 기억하는 일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하여 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것은 그 이유를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외면하고 싶어서였다. 이해타산을 따져 당장 내게 득이 될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릇된 생각이었음을 알았다. 다른 무엇보다 적어도 미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나는 K의 마음을 생각하며 이렇게 되새겼다.


나는 뜻 없이 이곳에 왔다. 그 과정에서 내게 득이 되는 배움이나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은 무목적에 가깝다. 칸트가 언급한 '무목적의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을 감히 빌려 나는 이곳에서 자연히 아름다움을 발견하리라 믿으며 그저 당위를 따라 지낼 뿐이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세 줄을 덧붙였다.


다만 내게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K와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심미안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발명에 모두가 탄복하는 그러한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평화의 신기루 안에서 각자 치열하게 싸우는 K와 내 모습이 언제 비치어 보아도 아름다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




- 마음의 결로(結露)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날이면 되려 뭐든 괜찮았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면 조금 나아질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 들게끔 마음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를 마음의 문제로 돌리며 자책하지는 않았다. 내게만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기분이 나쁜 일은 내 기분에 대해서 제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러니 나 역시 내게 주어진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또한, 나는 언제나 겁을 먹으면 달아나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아무개의 눈에는 그렇지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도망칠 때면 나는 전력을 다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빨리 나아갔고 두 눈은 언제나 세상을 거스르는 방향이 아닌 세상 너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뒤처지는 일 자체가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뒤서는 존재에 대한 세상의 홀대와 경멸은 늘 두려웠다. 빛이 닿지 않는 후미에 있을 때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언제나 경계해야 했다. 어둠의 경기장에서는 날마다 누가 더 어두운지를 겨루곤 했다. 더 어두울수록 인정받는 세계, 그런 곳에 한때 발을 담갔던 나는 덕분에 도망칠 때도 앞을 보는 습관을 익혔다. 그러니 한편으로 두려움은 삶의 큰 원동력이었다. 묵묵히 빛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을 앞지르기도 한 것은 어둠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그보다 컸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새기지 않으려 하는 모습과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나의 마음은 서로 닮은 점이 없어 보여도 사실 그렇지 않았다. 위기를 느끼면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멀리 이주시킨 셈이었다. 마치 세상의 전선에 서서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동시에 나의 마음은 저만치 후방에 숨겨 놓으려 한 것이었다.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은 자아였고 이는 곧 나의 본체와 다름없었다.


자아. 아(我)는 아가 아닌 것과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길 원했다. 그러한 바람만이 앞서고 잘되지 않았을 때 나는 아를 조금은 가엾게 여기기도 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면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구별 따위는 오만한 생각일 뿐, 세파와 유희를 모두 겪으며 평범히 살아감이 더 행복할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마음에 세상을 들이는 만큼 즐거움뿐만 아니라 괴로움의 총량 역시 불어났다. 즐거움은 그저 일시적이었다. 일례로 몇 시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밤이 되면 종종 허탈감이 들었다. 즐겁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거의 전하지 못하곤 했다.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 새벽까지 글을 써야만 잠들 수 있었다. 다시 세상에서 멀어져 잔뜩 화장한 마음을 문질러 씻기고 나서야 다음날 문제가 생기지 않던 것이었다.


하지만 온실 속의 화초라는 표현이 있듯이 언젠가 마음도 불가피하게 그러한 온실을 벗어나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었다. 외면하거나 무심히 대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시간도 있을 터였다. 마치 눈앞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처럼 온전히 마주해야 하는 진실 앞에서 각오하지 않은 마음은 그대로 얼어붙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한 시험의 시간은 생각보다 너무 일찍 찾아왔다. 그것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위기라 생각해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망친다는 것은 그만한 각오와 함께 탈출구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것은 내면의 나에게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도덕적으로 매사 올곧은 사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는 무엇이 옳은 도리인지에 관한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이기도 했지만 끝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이미 그렇게 행한 때가 있었다. 이곳에서도 그러했다. 후임이 작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나는 책임을 지기 싫어 그의 잘못을 밀고한 적이 있었다. 그가 심문을 받는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을 때 이미 나는 더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규율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해서 언제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군인으로서는 어떨지 모르더라도 인간으로서 나는 실격이었다.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어릴 때는 이러한 태도를 미성숙한 탓으로 돌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성인으로서 나는 이미 미성숙을 잣대로 다른 누군가의 성품을 평가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친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두기도 어려웠다. 나는 가장 힘들 때 사람의 본성이 잘 드러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 이를 면죄부로 삼는다면 나의 본성이 밑바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내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면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다. 나를, 마음을 마주해야만 했다.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선생님'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간 알베르 카뮈나 페터 한트케의 작품을 읽으면서 타자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에 주안을 두었으나 나 자신을 의심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에는 막연했다. 그렇지만 나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작업은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정작 나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돌연 작년 겨울에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를 시청했던 일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헝가리 속담 중에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일, 하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드라마 후반에 주인공이 끝내 말하고자 한 주제의식은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도망치지 말아야 하는 때도 있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여태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인지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내가 실제로 지키고자 한 것은 나 자체가 아니라 내가 지닌 순결한 부분, 그리고 비루한 부분조차 다듬을 수 있는 올바른 인식과 의지였다. 그렇지 않고 나 자신의 총체를 아끼려 한다면 외부로부터 상처받는 일을 피할 수는 있어도 발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의심하는 것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대개 학문의 길은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되는데, 깊이 고민을 하던 와중 성찰에 도움을 준 고마운 친구들이 몇 있었다. 한 친구는 철학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라는 책을 권해 주었다. 여러 언명이 존재하여 단순한 요약은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정리한 것은 침묵은 단지 말을 아끼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이며 자신을 관찰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었다. 그의 번역된 저서를 살펴보던 중 이러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직 무작정 앞으로 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향을 알지 못하는 언어는 폭력적이다." 이 문장을 읽고서 친구가 내게 이 책을 권한 의도에는 내가 적는 글에 관한 충고가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이내 내가 그의 의도를 곡해했음을 알았다. 그것을 곡해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그러한 충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조금은 알고 있었다. 내가 매일 적는 글들은 그의 평처럼 솔직하고 또 세상을 바라보는 세밀한 시선이 담겨 있었을지는 모르나 그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온전히 나를 성찰한 것은 아니었다.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한 날들, 취기에 정제되지 않은 언어들을 쏟아낸 날들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솔직함을 큰 미덕으로 여겨 이러한 잘못된 습관들까지 나의 일부로 품어 안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친구의 첨예한 지적을 흘려보낼 뻔했다. 글을 쓰기 위한 눈과 귀는 열어두면서 정작 나 자신과 내 주변의 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침묵의 시간 속에서 언어가 태어나고 침묵의 가치는 끝내 발화를 통해 증명되듯이, 자아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자아에도 묵상의 시간이 필요하며 그러한 성찰은 완숙을 위한 불가결한 과정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그 자아를 가지고 세상과 올곧이 마주하는 경험이 요구되었다. 내가 지녀야 할 것은 두려워 피하거나 외면하는 것도, 딱딱히 경직되어 맞닥뜨리는 것도 아닌 유순한 얼굴로 세상과 대화하는 태도였다. 누군가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한다면 몇 번 더 되돌아보고 그래도 잘못된 점을 찾을 수 없다면 피하지 않아야 했다. 아무개에게는 당연한 사고과정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에 미숙했다. 누구보다 나를 살피는 일에 익숙하다고 생각해 오히려 발목을 잡힌 격이었다.


조금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고 여기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 자신조차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되려 나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은 마음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었을까. 내게는 마음을 보호하고 떠받드는 태도가 아니라 마음을 검증해 스스로 믿을 수 있게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다면 어떠한 자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마음에 대한 회의는 거둘 수 있을 터였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늘 내 안에 있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아침 창가에 맺히는 이슬처럼 매일 닦아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너머의 세상이었다. 다만 그 몫만이 언제나 내게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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