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난 이렇게 생겨먹어 가지고

사실 나 그렇게 안 예민해

by 스위밍

- 근데 사실 니는 그렇게 예민한 건 아닌데.


친구가 말했다. 마음이 아파 휴직을 결심했다는 내 말에 친구가 보인 반응이었다. 그런가? 나 별로 안 예민해?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눈이 번쩍 뜨였다. ‘사실 널 오래전부터 좋아해왔어’라는 말만큼 기분 좋은 말이었다. 정유미-이진욱 주연의 ‘로맨스가 필요해 2’에서 정유미의 썸남이 정유미에게 ‘순둥이’라고 하자, (극 중에서 지랄 맞은 성격의) 정유미가 종일 그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며 “정말? 나 순둥이야? 맞아, 나 순둥이야 순둥이!”라고 말하던 장면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자기 전에 누워서도,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문득문득, ‘맞아, 나 그렇게 안 예민해’라는 생각을 하며 비식비식 웃었다.


그 말에 탄력을 받아 시험을 해봤다. 집을 빼줘야 할 시점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사 갈 집이 안 구해져도 크게 불안하진 않았다는 얘길 하며, 또 다른 친구를 슬쩍 떠봤다.


- 그러고 보면 내가 은근 느긋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몰랐나 니 느긋한 거? 난 예전부터 그게 항상 부러웠었는데.

- 내가? 그런가?


시치미를 뗐지만 마음속에선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미의 세포들’ 웹툰으로 치자면, 내 마음속 오두방정 세포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나팔을 불며 “나 느긋하대! 들었어? 나 느긋하대!”라고 소리치는 기분이었다.


맞아. 생각해보니 나 느긋하고 낙천적이야. 비행기표만 끊고 여행 가고, 여행가방도 당일 아침에 챙기잖아. 맞아, 내가 얼마나 느긋하면 버스, 기차, 비행기(국내선이지만) 다 놓쳐봤잖아. 맞아. 나 적응도 엄청 잘하잖아. 나 아프리카에서 한국사람들 만나지도 않고(사실 없었음) 무려 상사랑 같은 집에서 1년 살면서도 멘탈 괜찮았잖아. 그것뿐인가? 내가 힘들다고 누구한테 징징거리는 전화를 해본 적이 있어, 서울에서 지난 3년 반 동안 만날 친구들이 제대로 있길 했어, 엄빠한텐 애초부터 의지하지도 않았었고. 남들보다 심리적 안전기지가 취약한 내가 혈혈단신 여기저기 다니면서 잘 살고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솔직히 이 정도면 대박, 아니 중박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선방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지난 몇 달, 길게는 올 한 해 동안 스스로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했는데, 스트레스 상황 보다도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에 대한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아 왜 난 이렇게 생겨먹어 가지고, 인생 피곤하게 산다. 아 왜 엄마는 왜 날 이렇게 키워가지고, 진짜 피곤하다. 나도 무던한 사람이고 싶은데. 생각이 거듭될수록 나의 세계가, 내면이 자꾸만 더 수축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난 아코디언처럼, 플리츠스커트처럼, 양손으로 잡고 쭉 하고 펼치면 이렇게나 늘어나서, 이렇게 큰 세계를, 이렇게 다양한 사람을, 이렇게 지랄 맞은 상황을 다 경험해내고 품어낼 수 있는 사람인데. 스트레스 상황이 계속될수록 역치가 낮아지고 불안이 높아졌다. 그러다 급기야는 아코디언을 당길 힘도 없어졌다. 플리츠스커트가 기모노 치마가 되어 날 옥죄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상하게 만들었다.


근무 마지막 날, 함께 일하던 동료가 내게 말했다.

- 우리는 원래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야. 지금 잠깐 이렇게 된 거고, 사실 그렇게 되는 건 너무 당연해. 누구라도 너무 힘들었을 거고, 나도 아마 그 사람이랑 그렇게 일했으면 그렇게 됐을 거야. 근데 원래 너는 진짜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그걸 잊지 마.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은 말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이나 눈물이 터지는 내 감정에 당황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실 안에서 늘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한숨과 하소연을 달고 다니면서도, 그런 내 모습에 스스로 더 지쳐 더 큰 한숨을 내쉬었었다.


휴직기간 동안, 나는 나의 스커트를, 아코디언의 가로폭을 다시 늘려볼 참이다. 아니, 자연스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안되면 뭐 또 어쩔 수 없고.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의사선생님이 장식한다. 친구가 해줬던 말들을 정신과 선생님께 했더니, 선생님으로부터도 내가 기대한 답정너 답변이 돌아왔다.

- 친구 말이 정확한 것 같은데요.


집에 돌아와 언젠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첫 페이지에서 읽었던 시를 다시 찾아 읽어봤다. 우리 모두는 여인숙이다. 모두 반갑게 맞아주자. 월남치마를 입고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오든 그 손님들로 인해서 여인숙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용하게 머물다가 지나가든 밤새 소란을 피우든,
다음 날 아침이면 손님들은 여인숙을 나설 테고, 저녁이 되면 여인숙은 다시 간판에 불을 밝히고 새로운 손님을 기다릴 것이다.
어린 시절, 매일 저녁마다 내가 보았듯이,
여인숙은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눈을 뜰 것이다.
루미의 시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 나의 기분은 어땠는지?
마음속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잠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다가 떠난 고마운 손님이었는지, 이불이 더럽다고 화를 내느라 밤새 잠들지도 못하다가 급기야는 집을 부수기 시작했던 난폭한 손님이었는지. 네 마음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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