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마르디히말 트레킹
1. 네팔에 온지 열흘 정도 되었다. 친구와 5일동안 마르디히말 트레킹을 했다. 인천공항 가는 길, 무거운 짐을 들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했더니 출발도 전부터 허리가 아파왔다. 이 허리로 밤 비행기를 타고 가서 히말라야를 올라야 한다니. 네발로 기어내려오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트레킹 일정 중 허리 통증은 없었다. 되려 허리가 아플 때는 짐을 지고 걸을 때가 아니라 롯지 의자에 앉아있거나 침대에 비스듬하게 앉아 책을 볼 때였다. 복병이었던 무릎도 올라갈 때에는 제 역할을 충실히 잘해줬다. 무릎보호대와 스틱의 힘으로 큰 통증없이 잘 올라갔다. 내 체력이나 하체 근력이 그새 늘었을리가 (결코) 없는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 조금 놀랐다. 힘들만 하면 길이 괜찮아지고, 아 이제 좀 힘든데 싶으면 목적지에 도착했다. 반면 내려올 때에는 “My nees, my nees!”를 울부짖었다. 이젠 포카라 시내에서도 무릎보호대를 차고 걸어야 할 판. 도수치료 선생님 얼굴이 어른거린다(...)
2.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그 전과 달라진 점을 발견했는데, 하나는 환승 대기 시간에 공항 노숙을 하지 않기 위해 호텔을 예약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여행자 보험과 비상약을 꽤 꼼꼼히 준비했다는 것, 또 하나는 - 이건 도착해서 인데 - 주구장창 한식과 일식을 먹었다는 것, 마지막은 친구가 떠나고 난 뒤 (처음으로)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와봤다는 것이다. 10년만의 장기여행인데 긍정적인 쪽으로든 부정적인 쪽으로든 세월을 느꼈다(...).
3. 마르디히말 트렉은 걷는 재미가 있었다. 정글, 평지, 돌길, 흙길, 오르막, 내리막이 골고루 분포해있었다. 킬리만자로 트레킹 때는 3천미터 지점에서 계속해서 평지를 걷느라 신기루 같은게 보일 지경이었는데, 이번엔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마지막 베이스캠프 가는 길이 조금 가파르긴 했지만 암벽 등반하듯 올라가는 재미가 있었다(사실 그것도 킬리만자로 마지막 날에 비하면 괜찮은 수준이었다). 고산병도 거의 없었다. 약간의 두통과 숨가쁨 정도였다. 무릎을 포함한 하체 근력을 좀 더 키운 뒤엔 ABC나 서킷도 한번 해보고 싶다. 내 무릎이 버텨주는 한도 내에서.
4. 5일 중 3일째까지 날이 흐려 안개속을 걸었다. 마차푸차레는 커녕 몇 걸음 앞의 가이드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래서야 뷰포인트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가본 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3일째 밤, 그러니까 베이스캠프 올라가기 전날, 비가 내린 뒤 구름이 걷혔다. 그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하늘에 쏟아질 듯한 별이 보이고, 저 멀리 (마치 CG처럼) 산이 보였다. 하루 전날만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가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산이 사라진 건 아닌데, 산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계속 있었는데. 그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 뿐인데. 조바심 낼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5. 걷는 중엔 걸음을 옮기는 것에만 집중했고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롯지에 도착했고, 어느 순간 돌아보니 출발점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와있었다. 의심하는 게 내 문제라면 문제인데, 매일매일 성실하게 걸으니 어느 순간엔 하룻밤 묵을 수 있는 롯지가, 또 어느 순간엔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히말라야산맥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난 3년 반이 모두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나는 출발점으로부터 어떤 방향으로 혹은 얼만큼의 고도로, x-y-z 축의 그래프에서 좌표를 찍는다면 어디쯤일까, 혹시 후퇴한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했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정상 등정을 준비하는 베이스캠프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평생을 살아도 일인칭으로밖에 보고 듣고 생각하지 못하는 나는 앞으로도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는 다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가 내 길잡이가 되어 주리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