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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Apr 07. 2019

요즘의 생각들

의식의 흐름대로

1.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어졌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처음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역시 처음이었다. 나의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아름다운 예술 활동이 아니라 그저 배설 또는 자기 위로의 목적이었다. 은유 작가가 <쓰기의 말들>에서 한 말을 빌려, “글쓰기는 나만의 속도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안전한 수단이고, 욕하거나 탓하지 않고 한 사람을 이해하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나 탐미주의 같은 것은 내게 해당사항이 없었다.


책을 준비하며 그간의 글을 다듬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하니 손댈 부분이 많아 보였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차치하더라도, 나 개인의 서사가 타인에게 주는 의미, 혹은 효용이랄 게 무엇일지 자문했다. 누군가에게 읽히려면 이 글이 내 푸념이나 살풀이에 그쳐서는 안됐다. 적어도 조금의 아름다움, ‘문학’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속성은 갖춰야 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는 결국 문학이나 음악이나 영화는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 - 추악한 아름다움이든 현실에서 발을 뗀 환상적 아름다움이든 - 을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요즘엔 책을 읽으며 문장을 수집한다. 마음에 드는 문장은 따로 표시해서 모아둔다. e북으로 책을 읽으면 하이라이트 표시를 하기가 쉬워서 좋다. 진지하게 e북 리더기를 사야 하나 고민했다.


3. 은유 작가의 문장은 세공사가 시간을 들여 깎고 다듬기를 수도 없이 한 보석 같았다. 모든 표현과 단어가 적확했다. 이유 없는 문장, 그냥 쓴 문장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밀도가 높고 잘 다듬어져서 되려 감동이 덜 할 만큼. 거의 모든 문장을 꼭꼭 씹어내야 하다 보니 약간 버거울 정도였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문장이란 것에 대해 또 하나 배웠다.


4. 아름다운 글을 쓰려면 아름다운 글을 읽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글로 치자면 시 만한 게 없다. 오랜만에 심보선의 시집을 꺼내 들었다. 유려한 아름다움이었다.


5. 인중을 긁적거리며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 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6. 너는 내게, ‘그냥’이란 건 무신론자나 하는 말이라고, 세상에 이유가 없는 건 없다고 했다. 왜 자기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우물쭈물하며 그냥, 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라고 말하는 내게. 네 말을 들은 나는 더 바보 같은 말들만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아니 내가 널 왜 좋아하냐면, 그게 말야, 그게… 그건 고백이라기보다 변명에 가까웠다. 4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도 생생하다. 그 고백 장면은 내 인생에 두고두고 남을 이불킥 컷으로 박제됐지만, 그 애가 한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고 어쩌다보니 누군갈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고, 나는 그 사실을 혼자서는 깨달을 수 없었다. 그 애의 말이 맞았고 심보선의 말이 맞았다.


7. 다시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일이 생긴다면 그땐 심보선의 시를 건넬 것이다. 우물거리며 말하지 않고,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자”고 말할 것이다. 심보선의 시집으로 청혼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런 일은 심보선만 할 수 있을테니. 허황된 기대는 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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