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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Jun 17. 2019

친구에게

17년 전에 네가 내게 준 증명사진과 명찰을 들고 강릉에 왔어. 너를 만나러.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건 아마 스무 살 즈음이었을 거야. 국문과에 갈 줄 알았던 너는 한의대생이 되어 있었지. 공부가 영 맞지 않아 힘들다고 했어. 하지만 넌 빨리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그러려면 인생에 보험이 필요했다고, 그러기엔 한의대에 가는 것만 한 게 없었다고 했어. 세상 모든 일이 보험에 보험이라고, 하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건 너와 나 사이에 보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너는 조숙하고 생각이 많은 아이였어. 하지만 열네 살의 나는 내 감정밖에 볼 줄 몰라서, 네가 어떤 아인지 잘 몰랐던 것 같아.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너는 항상 나를 받아주고 응원하고 칭찬하는 쪽이었거든.

우리는 열네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를 꼭 붙어 다니며 보냈어. 어디서 들은 말인데, 그 시절 단짝 소녀들의 관계는 우정인지 연애인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하더라. 우리도 그랬던 것 같아. 대놓고 싸우진 않았지만 토라지고 삐지고 예민하게 굴고 질투하고. 그러다가도 또다시 잘 지내곤 했어.

너는 열아홉 내 생일에 커다란 꽃바구니와 편지를 학교로 보내주었지. 너는 언제나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무얼 하든 넌 잘할 거라는 말로 편지를 맺었어.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나는 문득 궁금해하곤 했어. 왜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는지 말야.

그때나 지금이나 너는 나를 엄마처럼 챙겨줬어. 나를 차 뒷자리에 태우고 강릉 곳곳을 누비는 너와 네 남편의 뒤통수를 보며, 나는 가족여행을 떠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어. 너는 내게 맛있는 걸 사주고 좋은 델 데려가고 뭔가를 사서 내 손에 들려주었지. 그 뒷모습을 보며 피식피식 웃다가도, 가끔 스치는 네 어두운 얼굴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

내 이야기는 책에 다 있으니 이제 네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13년 치 업데이트를 좀 하자고 했지. 네 얘기를 들으며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조금 놀랐어. 보험을 들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위협이 제거된 것도, 늘 순탄하고 행복했던 것도 아니었더라. 혹시라도 내 반응에 네가 상처를 받을까 봐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지. 친구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 일들을 겪었구나. 우리는 각자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이렇게 다시 마주 앉았구나. 시간이 많이 흘렀네. 우리는 이제 소녀가 아닌 거야.

나는 너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오버하는 것 같아서 참았어. 네게 닥친 일들을 이제는 담담하게 내게 ‘업데이트’ 해 줄 수 있다니 다행이었어. 그 시절 그 아이에 대한 신뢰 하나로 강릉에 오길 잘했다고, 변함없는 너의 초대에 긴 생각 않고 응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묘하게 그때부터 지금까지를 관통하는 뭔가가 있더라. 우리는 “네가 이렇게 진성 빨갱이가 되었을 줄이야”라며 웃고, 스피커에서 새로운 노래가 나올 때마다 함께 따라 불렀지. 사람 역시 잘 안 바뀌나 봐.

우리 참 잘 컸어. 가끔은 멋대로 굴기도 했고, 그래서 절레절레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게 컸다 싶어. 가끔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나를 키운 걸까 생각해. 나를 받아주고 이해해 준 친구들 덕분에 그나마 이만큼 사람 구실을 하게 된 건지도 몰라. 나도 누군가에게 너 같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네가 행복하길 바래. 네 마음이 언제나 평안했으면 좋겠어. 너를 위해 기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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