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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Oct 03. 2016

에필로그 - 귀국행 티켓을 연장했다

퇴사 후, 50일 가까이 서유럽을 돌았다. 50일 동안 깨달은 몇 가지.


1. 거세당한 나의 미적 감각, 향유의 정신.


 “이게 왜 유명하단 거지?”


어디가 훌륭하니까 유명할 텐데… 도무지 내 눈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왜 나는 명작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훌륭한 작품을 스스로 감상해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대 정신이 탁월하게 반영되어 있어서, 바로크양식을 훌륭하게 반영해서'라는 주입식 입시교육을 통해 명작을 '암기'한 탓에 제대로 자라지 못한 우리의 미적 감각. 나는 유럽의 아름다운 예술작품 앞에서 번번히 기가 죽었다. 나 스스로 무엇인가를 느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단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울적했다. 하지만 나를 방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 스스로 생각하는 법

 매번 스스로 다음 목적지를 정하고, 잘 곳을 정하고, 먹을 것을 정하고, 대신 결정 내려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주는 당혹스러움. 50일 동안 결정에 지쳐갔다.

12년간의 정규 교육, 4년간의 대학생활. 그리고 직장생활. 뭐 어찌어찌 하긴 했는데, 그중에서 내가 원해서 한 일이 하나라도 있는지 생각해 본다. 엄마의 한을 풀고자(?) 갔던 인문계 고등학교와 대학교. 남들이 취업해야 한다니까, 토익 점수가 높아야 된다니까, 스펙을 쌓아야 한다니까 따라다니기 바빴던 시절. 졸업 후에 겪었던 백수는 어떤가. 맘 편히 놀지도 못하고, 취직 못한 나 자신을 학대하기 바빴다. 남들이 짜 놓은 판에 못 껴서 항상 불안했던 그 시절. 하지만 막상 취직하고 나서는 남들이 시킨 일 하기 바빴다. 내 의견이 펼쳐질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았고, 막상 내 의견을 말하면 어린 여자가 뭘 아냐고 묵살당했다.


거세당한지도 모르고, 바보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지난 30년, 그 30년의 세월을 깨달으며 갑자기 억울해졌다. 나이는 서른이나 먹었는데 다시 백수가 되었고, 좋은 것을 봐도 그게 왜 좋은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사소한 결정조차도 항상 힘들어하는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여행까지 와서도 가끔씩 떠오르던 회사에서 하던 일.

 '그 일은 잘 진행되고 있을까?'

어디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는데, 나 이렇게 아무것에도 속해 있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기쁘면서도 항상 날 불편하게 한 그 기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이 든 게 50일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아무도 날 찾지 않고, 아무도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어디서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갈지 결정 내리는 것이 더 이상 버겁게 여겨지지 않았다.

진정한 백수, 여행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난 한국행 리턴 티켓을 연장했다. 그리고 유럽의 동쪽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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