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서의 하루, 이탈리아
전날 오후 3시부터 숙소에서 방콕한 보람이 있던 걸까. 비로소 피렌체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괜히 들뜬 마음으로 숙소를 나와 이리저리 걷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만 했던 두오모 대성당으로 가는 길. 영업을 시작하려는 노점상들, 긴 줄을 피하기 위해 일찍 숙소를 나선 관광객들로 거리는 조용하게 어수선하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줄 근처에 이렇게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연주 중인 한 연주가 언니가 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한 행위이지만, 여전히 나 같은 여행객에겐 이곳에서 들리는 음악조차 감미롭다. 살기가 아무리 팍팍해도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양한 음악을 접하면서 살고 있는듯하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길에서 무엇을 하는 행위가 얼굴 팔리는 일쯤으로 치부되어 어쩌면 누군가의 돈벌이 수단과 재능을 사용하는 일 하나가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난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만났고, 해운대 바닷가에서 마술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 기계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내 앞에서 노래를 하고 연주하는 것을 듣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다.
줄 서 있는 10분간 내 귀가 호강할 수 있게 해 주어 감사를 표하고는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봐 온 성당들처럼 적절히 위치한 창문과 그 스테인드글라스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어김없이 경건한 이미지가 밀려온다. 쿠폴라(성당의 돔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일 듯한 부분에 그려진 천장화를 계속 보고 있으니 마치 내가 하늘나라로 쭈우욱 빨려 올라갈 것 같다..
사실 성당 안의 모습보다는 외관이 더 눈길을 끌었다. 그냥 벽돌이나 대리석 같은 건축자재로 건물을 지어놓은 것이 아닌 건물에도 붓으로 색칠해 놓은 듯한 그 외관. 색의 벗겨짐 때문에 지속적으로 관리해 주어야 할 것 같은 그 외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지속적으로 관리해 주고 지켜주어야 하나 보다. 그 행위를 잊어버리거나 등한시하면 결국 소중한 것과 나 사이의 관계를 틀어질 수 있다. 혹은 누구 하나 상처를 받거나...
프랑스에서나 이탈리아에서나 여전히 거리를 걷고만 있어도 로맨틱함이 뚝뚝 묻어난다. 옛날 거리가 주는 황홀함은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같은지 이 풍경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특별해지는 그런 느낌이다. 특히 유럽의 벽돌 길과 건물은 더 그렇다. 한국의 옛 거리, 특히 돌담길이 많이 허물어져 정말 아쉽다. 게다가 조금만 인기를 얻으면 유명 프랜차이즈 거리로 금세 탈바꿈해 버리는... 물론 이곳도 상업화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도시의 아이덴티티까지 위협하지 않는다.
피렌체에서 유명한 하나는 바로 소가죽인데 그렇다 보니 가죽 제품 상점도 쉽게 찾을 수 있고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장에서는 가죽 가방을 흔히 볼 수 있다. 진품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made in Firenze"란 문구는 우리에게 매혹적이긴 하다. 잠시 강력하게 강림하신 지름신을 앞으로 2달 반은 여행 다녀야 하기에 짐을 늘릴 수 없다며 겨우 설득해서 떼어낸 후 (그 돈으로) 피자를 먹으러 갔다.
보물 같이 발견한 명작 모조품 전시장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도시답게 엄청난 예술작품이 산재해 있지만, 유명한 미술관에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곳의 줄은 엄청 길다. 진품을 알아볼 능력은 없고, 줄도 서기 귀찮은 나 같은 귀차니스트들을 위한 곳, 우연히 보물 같은 "Loggia della Signoria detta dei Lanzi"란 곳을 발견했다.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된 전시공간으로 명작들의 복제품이 진열된 곳이다. 아무리 우피치 미술관을 화끈하게 제쳤다고 해도 약간 남아있던 아쉬움이 이곳에 복제되어 전시된 '다비드 상'을 보며 사라진다. 그 외에도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아폴론 등의 동상이 작은 공간에 들어차 있다. 미술관의 근엄한 분위기와 달리 동상의 바로 아래에서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아 미술작품을 감상하거나 쉬고 있다. 미술관보다 오히려 격식 없고 편안하며 아무 때나 영감을 얻어갈 수 있다면 이곳이 바로 위대한 미술관이 아닐까…
“아 이런 다리마저도 로맨틱한 도시라니!”
큰 도시들이 으레 그렇듯 이곳에도 큰 강이 있고, 그 강을 따라 도시가 발전했다. 이곳의 강은 특히 소설가 단테가 그의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만난 베키오 다리가 유명한데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의 머리가 멀리서 빽빽하게 보이는 한 다리가 눈에 보였다. 다리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이 들어서 있어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작 다리 위에서 강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게다가 빽빽한 사람들과 그보다 더 빽빽하게 들어선 보석 가게들. 예전에는 다리를 따라 푸줏간이 길게 늘어서 있다고 했는데 그곳의 냄새가 싫었던 왕은 푸줏간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고 대신 보석 가게가 들어오게 했단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베키오 다리 위에는 보석 가게가 넘쳐난다. 그 때문에 별로 자물쇠를 달 틈이 없는 다리이지만 사랑을 약속하고 싶은 연인들은 기어코 자물쇠를 걸어놓았다. 과연 어떻게 저곳까지 가서 자물쇠를 매달았을까. 그 열정을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데 쓰면 어떨까 하며 한껏 꼬인 면모를 드러내다가도, 단테 덕에 함께 유명해진 베아트리체를 생각했다. 그래, 이곳엔 정말 누군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던 곳이었다.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순수한 마음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자물쇠는 기를 쓰고라도 매달고 싶을 것 같다.(고 이해를 해 보자.)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도 보석가게에 점령당해 상업화된 다리를 보며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갔다. 성당과 궁전, 상점들로 시끄러운 곳에 있다가 상대적으로 조용한 반대편으로 오니 그제야 아름다운 피렌체가 보인다. 강은 깨끗하지 않지만 조용하게 흐르며 도시를 더 로맨틱하게 만들어 준다. 한여름의 태양 아래 강 위에서 노니는 사람들, 귀여운 젤라토 가게,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도시를 즐기는 사람들. 이곳이 피렌체구나.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니 이제야 실감 난다.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지막으로 피렌체를 내 눈에 가득 담을 수 있는 곳, 미켈란젤로 광장.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언니가 알려준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다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하고,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얼른 잡아 탔다. 걸으면서 천천히 보는 피렌체도 아름답지만, 조금은 거리를 두고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피렌체의 작은 산 위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니 산 정상에 위치한 작은 광장이 보인다. 광장 중앙 좌판에 널린 그림과 모조품 가방을 보며 이곳도 그리 조용한 곳은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비드 상 모조 작품.(도대체 몇 개의 다비드상 모조품이 이곳에 있는 걸까?) 역시 미술관에 갈 필요가 없었다며 혼자 씩 웃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주변 풍경에도 불구하고 빨갛게 물드는 도시는 피렌체의 빨간 지붕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고,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곳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샘솟았다.
해가 지고 있는 피렌체와 너무 잘 어울리는 "Volare"를 유쾌하게 부르고 있던 아저씨. 제목만 모르고 좋아하던 노래를 이곳에서 만나니 참 좋다. 잠깐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비로소 그 아름다움을 알게 된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날이 가고 있다.
PS. 내가 운이 좋았던지는 모르겠지만 이탈리아의 아무 피자가게에 들어가서 먹어도 피자는 항상 맛있었고 덕분에 몸은 무거워져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