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반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은 의도치 않게 No라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분이 왜 그렇게 일이 많은지. 여기서 말하는 일은 회사에서의 일뿐만이 아니라, 가정에 관계되는 일, 친구에 관계되는 일 등등 본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말한다. 항상 일에 치여 살아 안 되어 보이고, 늘 피곤해하고, 하루라도 그분 입에서 불평을 듣지 않은 날이 없어서 듣는 게 지치다가도 짠한 마음이 많았다.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착하다. 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입장에 쉽게 감정이입이 되고 그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는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푼다. 하지만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상대방은 어느새 이 호의를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되는 것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1) 누군가의 요청으로 (혹은 그렇지 않든) 호의 혹은 친절을 베푼다.
2) 몇 번 더 요청을 받으면 전에 했던 것처럼 호의라는 마음에 몇 번 더 베푼다.
3) 호의가 몇 차례 되풀이되면서 호의를 받은 사람은 이것을 점차 권리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아주 당연히 요구하고,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오히려 화를 내거나 면박을 주는 수도 있다. 호의를 권리로 여기는 것이다.
사람에게 몇 번 호의를 베풀 수는 있지만, 이 것이 내 기분 상하게 하거나, 어느 순간 나에게 부담이 된다면 그것을 그만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부담스럽다는 감정을 말하기 미안하다거나, 힘들다는 이유로 다시 참고 호의를 베푼다.
이런 식의 순환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No라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작 자신에게 중요치도 않은 어마어마한 양의 일을 혼자 짊어지고 끙끙대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이것도 할 줄 모르고, 저 사람은 매일 나에게 요청하기만 한다고 투덜댄다. 그리고 자신이 감당치 못하는 일의 양 때문에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못해, 정작 아무 상관없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때도 있다.
이 모든 일을 혼자 하고 있는 사람(A)의 주변에는 본인의 일을 A에게 넘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A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감독(?)하기까지 한다. 본인들이 A를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마치 그 일은 당연히 A가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런 사람들이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 옆에 있는 것도 묘한 링크가 있다.)
내 주변에 있던 이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분(직장 상사였음)은 자주 내게 자신의 삶을 한탄했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고 가는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학습능력이 뛰어나 실제로 3개 국어를 완벽히 구사하고, 거래처와도 굉장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도 잘 하고 매우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항상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혼자 다 하고 있어 힘들다는 불평에 가득 차 있고, 중요하지도 않은 많은 일에 허덕이고 있다. 난 진심으로 그녀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과연 No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No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녀의 기준을 아주 낮게 본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존중할 수 있도록 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시작될 수 있다. 자신이 정한 기준을 넘으려는 사람들이 있을 때 No라고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녀의 경계가 매우 낮다고 생각해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어느 순간 존중하지 않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서 그녀가 자존감이 상당히 낮은 상태라는 것도 보인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녀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일을 그녀에게 떠넘기고 그것을 관리, 감독(?)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하소연한다.
"내 남편은 왜 이거 하나 제대로 못하고 나에게 해달라는지 모르겠어. 내 부모는, 내 동생은, 내 친구는, 우리 거래처의 OO이는... 그리고 나한테 제대로 했는지 물어본다? 뭐야 내가 종이야?"
처음에는 그런 그녀가 너무 안타깝고 불쌍했지만, 그녀가 No라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그녀에게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녀가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씩 "그냥 안된다고 말하세요. 바쁘시잖아요." 내지는 "그거 안 하셔도 알아서들 하실 거예요."라고 말하면 그러기엔 마음이 불편하단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거절 못하는 성격을 이용하고 있음을 그녀 자신도 알고 있으면서 그녀가 하는 말은
"안 해주기 너무 미안해. 안 된다고 말하면 마음이 너무 불편해." 혹은
"내가 이런 성격인 거 뻔히 알면 자기들이 알아서 적당히 해야 하는 거 아냐?"
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 우선 나 조차도 가끔씩 그녀에게 해달라고 할까 라는 마음이 들 때마저도 있다.(물론 실제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많은 양의 업무 혹은 개인적인 일에 허덕일 때마다 그녀가 정작 해야 할 업무의 일부가 나에게 돌아오거나 아니면 내가 가끔 그녀의 일을 도우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그 일과 전혀 관계없는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오는 것이다.
거절이라는 것은 양쪽 모두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당연한 것이지만, 그 불편한 마음을 감수해야만 내 삶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생에는 Tradeoff가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 잠깐의 불편한 마음이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며, 그 조그만 결심이 자신의 인생을 사는 시작점이라고 본다. 난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