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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Dec 03. 2016

미루는 버릇을 미루기

나는 미루기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는가?


나는 미루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어!"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내가 언젠가 가고 싶은 여행지가 적혀 있고, 내가 언젠가 배우고 싶은 공부와 읽을 책이 적혀 있으며, 내가 언젠가 배우고 싶은 운동과 악기의 이름이 적혀 있다. 버킷리스트란 거창한 이름 때문일까? '죽기 전에'란 말이 내포한 '여전히 많이 남은 시간' 때문일까? 버킷리스트에 있는 것들은 쉬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어려운 것만 미룰까?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을 듣기는 하지만 그때에 일어나지 않는다. 어차피 일어나야 하는데 난 항상 알람 시간보다 늦게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내가 타야 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까지 뛴다. 5분 일찍 침대에서 일어나기를 미룬 대가로 난 아침부터 달리기를 하고, 땀을 흘린다. 땀을 식히는 동안 아침부터 찝찝함을 느낀다. 일할 때는 또 어떨까? 만들어야 할 보고서, 보내야 할 이메일. 해야 할 일이 생기거나 생각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알고 있다면 바로 하면 될 것을 난 꼭 미루다가 하루가 끝나기 전 혹은 마감 전 부랴부랴 보낸다. 주위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표시하는 것을 미루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들은 내 곁에서 멀어져 있다. 친구들에게는 말로만 다음에 보자고 한다. 귀찮다는 이유로 먹는 걸 미루다가 폭식해서 몸은 엉망이 되고, 이 닦는 걸 미루다가 어느새 이는 썩어 있기도 하다. 운동을 미루는 건 더 말해서 무엇하랴.


사소한 것을 미루면서 시간낭비를 하고, 안정적인 상태에선 5분이면 끝날 일을 데드라인 10분 전에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며 끝낸다. 이렇게 내가 매일 미루는 사소한 것들만 따져봐도 족히 10개는 넘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배우고 싶은 기타와 피아노와 프랑스어,  내고 싶은 책, 강사 자격증을 따고 싶은 요가와 줌바는 여전히 버킷 리스트에 남아 있다. 남미 여행도 마찬가지. 마치 미루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내가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미루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미룰까?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말만 하면서' 눈과 손은 끊임없이 일을 미룰 변명거리를 찾느라 바쁘다. 왜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미루는데 더 익숙할까? 내 몸은 왜 이렇게 게으르고 편안한 것만 찾도록 프로그래밍되었을까?


언젠가 내 삶은 끝이 나는데, 언젠가 내 앞에 있는 사람과 헤어질 날이 올 텐데, 언젠가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때가 올 텐데... 모든 것이 끝이 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내일도 아니고, 1달 후, 1년 후, 10년 후도 아니다. 아니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내가 가진 '영원한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오늘 내가 그 사람에게 못한 전화는 내일 하면 되고, 오늘 하지 않은 일은 내일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오늘 하지 못하면 내일도 못한다. 내가 가진 시간이 영원하다는 착각 속에서 내 엉덩이는 더욱 무거워서 앉은자리에서 도무지 일어나질 않는다. 이 착각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지만, 사실 쉽지는 않다. 


"대학 때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XX를 할 텐데."

"부모님 계실 때 잘 해 드려. 그 사람이 옆에 있을 때 잘해."

과거를 회상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를 할 텐데(혹은 ~를 하지 않았을 텐데).'와 '있을 때 잘 해' 시리즈.


"20대 초반은 3,4년 밖에 안 되는 시간이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아. 다시 돌아가도 별생각 없이 살 거야."

"부모님은 어차피 나보다 빨리 돌아가실 분들이야. 근데 굳이 내가 잘 할 필요가 있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소중한 시절의 한 때이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결국 한정되어 있기에, 잘 보내지 못했다면 그만큼 후회와 아쉬움이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주는 아쉬움과 회환의 감정. 그 감정을 좀 더 강렬하게 느낀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미루는 걸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20대 초반을 그렇게 흘려보낸 것이 너무나 아깝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좀 더 잘 하지 못한 게 아쉽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은 잠시 미뤄두자. 대신 시간이 조금만 더 흘러 1년 후가 되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미루고 도전하지 않은 1년 전의 나를 후회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사실 6개월 후만 돼도 6개월 전에 미루고 하지 못한 일에 대해 쉽게 후회한다. 



누구나 여행지에서는 부지런해진다.

여행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 하나 대충 하려 하지 않는다.(휴식이 목적인 여행이라도 온 힘을 다해 휴식을 취하려 한다.) 꼭 봐야 하는 곳 혹은 보고 싶은 곳을 가고, 그곳의 유명한 음식을 꼭 맛보고 하나하나 사진에 담으려 노력한다. 평소 게으른 사람도 여행지에서는 팔팔하게 움직인다. 왜 그럴까? 언제 다시 또 그곳에 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여행이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이 여행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에서 쓰이지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간의 유한성과도 맞닿아 있다. 언젠가는 끝이 나기에 의미 없는 게 아니라, 단 한 번 밖에 없기에 내가 할 일을 최대한 미루지 말자는 의미. 

지금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자신을 찾을 수 있다. - 괴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미루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던 류시화 시인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나 또한 슬슬 인도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세상이 자꾸만 날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만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올해엔 반드시 인도로 사라지는 거야, 뒷골목으로 말이야,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나 난 떠나지 않았다. 자꾸만 미뤘다. 이 지구의 동식물들 중에서 ‘미루는 것’을 발명한 것은 인간뿐이다. 어떤 나무도, 동물도 미루지 않는다. 인간만이 미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편의 충격적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했다. 폴란드의 한 유태인 마을에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자식을 키웠으며, 가축들을 돌봤다. 그런데 그들 각자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전에 성지순례를 한번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여 앉으면 입버릇처럼 말했다. 

“올해는 꼭 성지순례를 다녀와야지. 더 나이 먹기 전에 다녀와야겠어.”

그러면서 그들 각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 집 소가 새끼를 낳으면 꼭 가야지. 소가 배가 잔뜩 불러갖고 있으니 떠날 수가 있어야지.”

“난 신고 갈 구두가 없단 말이야. 구두 만사면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꼭 가겠어.”

“난 성지 순례를 가면서 그냥 갈 순 없어. 멋진 노래를 부르면서 가야지. 그런데 내 기타가 줄이 끊어졌단 말이야. 기타 줄만 갈면 떠나야지.”

그렇게 이유를 대면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성지 순례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독일군이 마을에 쳐들어왔다. 마을의 유태인들은 모두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은 발가벗긴 채 가스실로 향하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집 소가 계속 새끼를 낳았는대도 난 성지 순례를 떠나지 않았어. 그때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어.”

“난 구두가 없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지. 고무신을 신고서도 갈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난 기타 핑계를 댔지. 기타 줄이 없으면 성지순례가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어. 그냥 노래만 부르면서 갈 수도 있었거든.”

그들은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그때 갔어야 하는 건데! 이미 때는 늦었어!”

그들의 말처럼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가스실 문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영화가 끝이 났다. 관객들이 다 나간 뒤에도 나는 한참을 혼자서 앉아 있었다. 영화관을 나온 뒤 난 곧바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고, 1주일 뒤 밤 열두 시에 인도 뭄바이 공항에 내렸다.

                                                                                                   - 류시화 저,「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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