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라 Nov 03. 2017

돈이 있어야 여유를 부릴 수 있나

소피아의 재래시장에서

 소피아에서 3일을 지냈다. 원체 걷는 걸 좋아하지만, 걸어보지 않은 곳은 직접 가보지 않은 곳이라 여기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소피아에서 더 열심히 걸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벼룩시장을 만나기라도 하면 득템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물론 유럽인들의 주식인 빵, 치즈 등을 파는 시장이 주지만, 생필품이 아닌 것을 파는 벼룩시장이 참 많았다. 그림, 조각, 장식품 등 내 기준에 절대 돈 주고 사지 않는 물건들을 유럽 거리에선 그렇게 팔아댔다. 베를린에서는 50년 전에 친구에게 받은 엽서나 십 대 때 썼던 일기장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비싸진 않지만 전혀 쓸모 없어 보이는 물건을 파는 시장?1

처음에는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사냐 싶지만, 희한하게 유럽 어디에서든 산발적으로 이런 시장이 열렸다. 여유 있는 서유럽이야 그렇다 쳐도 동유럽에서도 이렇다니... 너희들 뭐 하는 거야? 한 푼이라도 아껴서 집 사는 데 써야지! 난 그들이 돈을 '낭비'하는 게 불편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에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나는 돈은 잘 모으지만, 정작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좋은 집과 차에 대해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모으는 것' 은 내게 최고의 미덕이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은 예쁜 게 아니다. '싼 물건'이다. 그러니 취향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취향이란 게 없는 인간이란 걸 여행을 하고 나서야 아니 한국을 벗어나고야 알게 됐다.



 

기차표를 사러 소피아 역에 들렀다 다시 돌아오는 길, 정처 없이 걷는 와중에 이번엔 소피아 전통시장을 발견했다. 물건을 사지는 않아도 이런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엔 진짜 현지인들이 사는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흥정하는 것인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비닐 진공팩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은 날것의 야채와 과일이 널려 있다. 괜히 기분이 좋다. 오늘이면 소피아를 떠나는 내게는 필요 없는 것들 중에서 기차 안에서 먹을 빵을 샀다.




조금 쌀쌀하지만 공원에는 오후의 따뜻한 햇살에 광합성을 즐기며 독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별스럽지 않은 모습에 눈길이 갔다. 유럽에 오기 전 벤치에 앉아 독서하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사람들이 바빴던지 내가 바빴던지 한낮의 이 모습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그 사람들 따라 나도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정말로 오랜만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여행 왔으니까 이것저것을 꼭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다 버렸다. 생계라는 이름으로 내가 무얼 버리고 살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조금 부족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것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한국은 동유럽 대부분 국가보다 잘 산다. 하지만 모두 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뛰어다닌다. 하지만 더 삶의 여유를 가지는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다. 사는 게 바쁘다고 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나보다 더 여유와 문화를 누리면서 사는 취향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혀 쓸모없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고, 사는 사람이 있다. 평일 오후에 공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여유에 너무 큰 짐을 지우고 있던 게 아닐까? 호텔 수영장의 선베드에 앉아서 낮잠을 자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만이 여유가 아닌데 말이다. 내가 몰랐던 삶의 방식을 하나씩 알아가며 씁쓸했다. 사실 여유란 것은 '내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것'인데 그걸 왜 항상 돈과 관련 지었을까? 굶어 죽을 상황이 아니고서야 다 할 수 있는 건데 말이다. 

그날 난 여행을 왔으니 무얼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다 버리고 벤치에 드러누워 파란 하늘을 구경했다.


P.S. 복 받은 도시 소피아는 도시 곳곳에 류머티즘과 위장병에 효험 있다는 온천수가 터진다. 게다가 온천수를 누구나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야호! 여기 사람들은 천사가 분명하다. 사람들은 빈 페트병을 여러 개 가지고 와 물을 가득 담고는, 두툼해진 가방을 메고 만족한 표정으로 식수대를 떠났다. 미네랄이 많이 들어 있어 딱히 맛있지는 않지만, 소피아에 있는 내내 잘 마시고 다녔다. 

구 소피아 온천, 지금은 박물관. 건물 앞의 무료 식수대에서 온천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는 그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