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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Feb 12. 2018

흙수저인 내가 싱가포르 취업을?①

해외취업을 생각하고 계신 20대를 위해

한국에서 나는 그저 그런 스펙을 쌓은 뒤, 지방 사립대의 인문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몇 개월간의 대기업 인턴과 다시 몇 개월간의 백수 생활을 거쳐 지방의 중소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직했다. 그 중소기업은 외국계 기업이긴 했지만, 한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으레 그렇듯 지극히 한국적인 곳이었다. 그곳에서 1년반쯤 일하다 싱가포르로 넘어갔고, 거기서 다시 4년간 일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처음 면접 봤던 회사는 DHL이었다. DHL이라니! 이름만 다 대면 아는 독일의 유명한 글로벌 기업 아닌가! 게다가 내가 일하고 싶어 하는 무역, 포워딩과 관련 있는 곳이다! 난 ‘예상 면접 답변’을 달달 외워갔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 DHL에서는 면접을 보기 전에 간단한 영어시험을 봤다. 당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내가 시험을 치게 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토익에서 본 듯한 여러 문제가 나오고 제한 시간 안에 그 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나지만, 확실히 싱가포르에서 살고 일하려면 영어가 필요하구나. 생각한 첫 사건이었다. 




내가 졸업할 무렵 이른바 필수 스펙은 학점, 토익점수, 공모전, 대외활동, 어학연수 등이었다. 1학년 2학기 때 연애에 좀 미쳤던 탓에 그때 학점은 깔끔하고도 깔끔한 2.00. 여전히 그 연애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그 학점을 메우느라 졸업할 때까지 재수강과 함께 살았다. 


나는 취직할 때까지 여권이 없었다. 어학연수는커녕 일본 여행 2박 3일도 다녀온 적이 없다는 말이다.

 "요즘 애들 어학연수 많이 간다던데, 너도 필리핀 같은데 보내줄까?"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줄 수는 있나? 거기 갔다 와도 영어 잘 하는 사람 한 명도 못 봤다. 안 가도 돼."

그땐 필리핀에 3개월이라도 갔다 오는 게 유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필리핀 3개월은커녕 3일도 힘들단 거 아는데 엄마는 왜 저런 말을 하지? 어차피 말 꺼내면 내가 필요 없다고 할 거 아니까 그러나?'

사실 외국까지 다녀와서 영어가 별로 는 것 같지 않은 친구들을 보며 어학연수에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외국에서 몇 달 혹은 1년 동안 살다 왔다는 자체는 정말 부러웠다. 지구 상에 얼마나 많은 나라가 있는데 한국을 벗어나 다른 곳을 경험한다는 게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지방대 인문대생을 공모전 스터디에 넣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공모전을 주최하는 회사나,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살면서 내가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는 것들 뿐이었다. 쌈빡한 아이디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몸으로 때울 수 있던 대외활동 조금과 그저 그런 토익 점수, 평점 4.0점을 거의 따라잡은 학점이 다였다. 어디 명함도 못 내밀 초라한 스펙의 소유자가 나였다. 


백만불짜리 싱가포르 야경

그런 내게 지방의 중소기업, 그래도 외국계인 그곳은 뽑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곳이었다. 주문 확인, 월마다 하는 결산, 보내야 하는 인보이스, 거래처 사람과 매일 하는 통화, 본사 직원 및 해외 고객과 영어로 주고받는 이메일, 가끔 나가는 외근. 달마다 받는 월급. 이 모든 것이 내가 드디어 사회인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취직을 했어도 영어회화 공부는 계속했다. 업무에도 필요하긴 했지만, 그냥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새로운 회사에서 정신없이 적응하며 일을 배우고, 한두 번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이에 6개월이 지났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업계의 용어가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나오고, 사람들은 나를 믿고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그때 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간간히 보람을 느낄 정도로 일도 재미있었고, 연애도 잘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외국인 고객과 간단한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도 늘었다. 취직을 했기에 명절에 친척들이 집에 오는 것도 불편하지 않았다. 친구들 모임에도 다시 나가고, 아는 동생들에게 밥 한 끼 사줄 수도 있게 됐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회사에 다니는 건 아니었지만 ‘외국계 회사‘라는 이름 뒤에 숨어 그럴듯하게 나를 포장했다.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이상하게 불안하기 시작했다.


'내 앞에 펼쳐질 60년 인생, 그 희미한 실루엣'

몇 달 후, 그 불안함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렇게 몇 년 더 일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아이를 학교 보내고, 은퇴하고 그리고 죽음. ‘사람 사는 거 다 그래!’라는 말속에 수백 번도 더 봤던 그 그림. 그 그림의 주인공이 나였다. 그렇게 정해진 내 미래에는 어느 것 하나 설레거나 기대되는 것이 없었다. 

 '인생이 이게 다야? 그러다 나이 먹고 그냥 죽겠네?' 

이 답답함을 어디 이야기할 때가 없어서 주말에는 서점으로 갔다. 혹시나 다른 삶과 이야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불안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건 그래도 책에서 읽는 몇 문장이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일주일치의 스트레스를 날리고 약간의 위로를 받곤 했다. 하지만 거기서 받은 위로는 월요일 아침 10시면 사라졌고, 그냥 그런 하루가 매일 이어졌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토요일, 무미건조한 얼굴로 서점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김수영 작가의 《멈추지 마 꿈부터 다시 써봐》라는 책을 만났다. 책 안에는 신세계가 있었다. 그때까지 한국 사람이 외국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었는데 그 책 속에는 영국에서 당당하게 일하는 한국인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그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 버렸다. 혹시 비슷한 책이 또 있을까? 서점의 한편에는 런던의 어느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 뉴욕의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바로 이거였다! 난 해외로 가야 했다. 대학교 때 얼마나 해외에 나가고 싶어 했나? 그 바람이 다시 기억났다.


돈이 없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돈은 거기서 벌면 되니까! 그때부터 인터넷에서 해외에서 일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칠레 등 사람이 갈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한국인들은 살고 있었다. 지역과 언어를 넘어 내가 상상도 못 하였던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놀랐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그렇게도 무지한 나 자신에 또 놀랐다. 오랜만에 설레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말에 해외 취업에 대한 에너지를 한껏 충전해도 월요일만 되면 내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고, 일에 묻혀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이중생활이 나를 서서히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게 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가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가야겠다! 마음을 다 잡기 위해 컴퓨터 바탕화면을 세계지도로 바꿨다. 생각은 그리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1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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