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이탈리아
2015년 8월 10일
로마에 왔지만, 로마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이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 어떤 편견-그것도 남이 만들어 놓은- 없이 로마를 만나고 싶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고대 로마는 내 기억 속에 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이 역사의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다른 시대의 역사에서는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기에 도시의 대부분이 고대 유적뿐이다. 그래도 내 기억을 쥐어 짜보며 로마를 기억하려 애써 보지만, 언제나 그렇듯 10년 전의 기억이 제대로 날리는 없다.
그저 지금 내 눈 앞에는 파리보다 조금 더 더러운 로마의 거리와, 파리만큼 엄청난 낙서의 연속일 뿐이다. 싱가포르처럼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 깨끗하고 높은 빌딩 없이, 더러운 거리의 민낯을 보며 그저 낄낄 거릴 뿐이다. 이러니 사람 사는 곳 같잖아. 그 해방감에 이곳 로마에서 마구 뛰어다니고 싶을 지경이다.
로마에 온 보람이라면 바로 이것인가. 숙소 근처의 후줄근한 식당에서 아무렇게나 시킨 피자와 스파게티도 굉장히 맛있다. 이 가격에 이런 맛이 나온다니.
든든히 배를 채우고 다시 떠나는 길. 도시 전체가 유적지인 곳에 당연히 박물관도 많다. 역시나 아무 정보도 없이 단지 너무 더워 걷기 힘들 때 눈앞에 띈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로마에서, 박물관에 들어가 보아도 다시 천장 없는 전시실도 연결되는 일이 부지기수.
이곳 역시 당시의 귀족들과 관련된 곳이라고 했는데 한창 발굴이 진행 중이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에서 불과 5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만큼 꽤 중요한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인도를 둘러싸고 있는 발굴 현장. 아무리 고대시대 이후로 힘을 잃어버린 로마라고 해도, 거의 파탄난 경제상황인 이탈리아라고 해도 결코 우리가 로마를 무시할 수 없는 로마의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옛날 거의 오늘과 비슷한 수준의 생활환경과 문명을 일구어 내며, 현대 문명의 뿌리를 만든, 그리고 여전히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 중인, 그 로마를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겠는가.
근데 근처에 바다가 있는가? 갈매기떼가 굉장히 많다. 심지어 갈매기의 (분비물) 습격을 조심하라는 경고판까지 붙어 있다!
로마의 한여름은 동남아의 날씨와 거의 맞먹지만, 그나마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만 있으면 매우 시원하다. 로마 시내의 회전 교차로 중앙에 높다랗게 자라고 있는 야자수를 보며 이곳의 여름 날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일사병을 막기 위해 AS로마의 협찬을 받은 생수가 무료로 배포된다. 얼마나 더웠으면...?
가이드북을 읽지 않은 탓에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디를 꼭 가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그저 지도에 나온 곳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로마 여행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여행을 떠난 지 1달 반이 지났을 무렵 한국음식이 너무 그리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인민박을 찾았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로마와 파리에서 뭘 먹고, 사고, 어디를 갔다며 몇 명이 같은 레퍼토리를 내게 이야기해줬다. 패키지여행을 온 것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 다들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나중에 저들에게서 여행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될지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다시 로마 이야기로 돌아와서 "로마의 휴일"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갔다는 분수와 스페인 광장 등이 표시되어 있는 곳에 끌려갔지만 공사 중이라 분수에는 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스페인 광장의 돌계단 위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그곳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게 금지되어 있단다. 알고 보니 오드리 헵번이 그 계단에서 젤라토를 먹었다고... 그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서는 저 계단 위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과연 그 영화를 봤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 계단을 오르는 내내 들러붙는 잡상인들.
"Beautiful lady, this is for you."
끊임없이 뻐꾸기를 날리며 장미 한 송이를 건네주시는 분들. 하지만 얼떨결에 장미를 받는 순간 난 돈을 내야 한다.
파리와 로마에 이렇게 많은 오벨리스크는 약소국 이집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깟 오벨리스크 몇 개가 없더라도(!) 남아 있는 엄청난 양의 문화재에 대한 이집트의 자신감을 보여 준다. 약탈해 왔을 수도 있고, 전리품일 수도 있는 오벨리스크는 바다 건너 로마와 파리에서 꽤 잘 적응하고 있다. 심지어 이곳 오벨리스크의 위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다. 여러 가지 오만 신들을 다 믿었던 이집트 사람들이 만든 오벨리스크에 떡 하니 세워져 있는 십자가가 왠지 우습다.
관심 없는 명품 거리는 빠른 속도로 지나쳐 버리고 파리에서도 봤던 판테옹에 입장한다. 이곳 역시도 이탈리아의 역사에 큰 공헌을 세운 여러 영웅들을 모셔놓은 곳이다. 다만 다분히 공적인 느낌이 가득했던 파리의 판테옹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조금 더 자연스러운 느낌과 함께 원래 건물이 지어졌던 목적대로 에배도 같이 드릴 수 있다. 근대 문명의 중심지였던 파리 역시도 로마에 빚지고 있는 게 많아 보인다.
더위에 지쳐 헤롱 거리고 있을 때. 자그마한 광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예술의 향연.(이라고 부르고 싶다.)
4명의 아저씨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은 공기 중에 퍼지고, 눈 앞에는 로마의 그림들이 한 가득 광장에 널려 있다. 한 장에 5유로 내지 10유로 하는 전형적인 판매용 그림들이지만, 하나같이 다 아름답다. 만약 지금 다시 로마를 간다면 그 그림 중의 하나를 구입했을 텐데...
4명의 아저씨들은 돈을 버는 것보다는 그저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즐거워하고 있었다. 연주하는 내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서 내 마음도 같이 따뜻해진다. 이 무명의 밴드는 본인들이 이 한 명의 여행객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적어도 지금 이 광장에서만큼은 이 분위기에 참 행복하다.
걷기에 지치고 피곤하지만 숙소로 가기는 싫어서 로마 테베레 강을 1시간가량 오가는 보트를 했다. 사람이 있는 곳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가만히 앉아서 그렇게 도시를 바라보는 그 기분이 참 좋아서. 거리만큼 강에서 보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둑 곳곳에는 여전히 낙서가 즐비하고, 놀러 왔는지 살고 있는지 구분이 가질 않는 사람들이 다리 아래에서 텐트를 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낚시를 하고 있다. 그래, 사실 문화재보다는 이렇게 사람들이 도시와 삶을 비비적대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테베레 강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곳은 사람 사는 곳, 로마이다.
그렇게 로마 시내 곳곳에 내 발자국을 남겨놓고 일찍 숙소로 가서, 더위를 반쯤 먹고 지쳐 빨리 곯아떨어졌다. 내일은 로마 안의 작은 나라 바티칸으로 가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