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만난 변태 덕에 잠을 제대로 못 자 기분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에 와 닿는 베를린 아침 공기는 무척 상쾌했다.
게스트하우스에 짐만 우선 맡겨두고 베를린 프리워킹투어를 하기 위해 나갔다. 메트로를 찾아가는 길이 꽤나 복잡하다. 이 글씨는 뭐라는 거야? 그리고 표는 또 왜 이리 비싸? 도착하는 곳이 몇 정거장 안 된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아주 대범하게(?) 무임승차를 했다. (덴마크에서 배운 나쁜 버릇이...)
프리워킹투어가 좋은 이유는 나처럼 아무 정보 없이 여행 온 사람들이 아주 간략하게 도시의 역사와 유명한 것과 장소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2시간 내외로 진행되어 시간을 그리 잡아먹지도 않는다. 투어가 끝날 때 웬만하면 모두가 가이드에게 감사의 의미로 '팁'을 주기에 완벽히 무료라고는 할 수 없다.
약간 길을 헤맨 후 도착한 프리워킹투어 시작 장소는 베를린 관광의 중심지로 보이는 알렉산더 광장 (Alexander platz). 나를 포함해 투어에 있는 사람들은 총 여섯 명. 2명은 뉴질랜드에서 온 6개월째 세계 여행 중인 커플이고, 3명은 호주에서 온 친구들이다. 늘 그렇듯이 새로운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영어 억양이 낯설어 항상 긴장하며 귀 기울인다. 근데 이 오세아니아에서 온 아이들은 지금껏 들은 발음 중 최악으로 못 알아먹을 지경이었다. 왠지 말을 하다가 마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빨간 벽돌의 성 마리아 교회와 베를린의 TV타워 Fernsehturm를 눈으로 훑었다. 무려 368.06m라는 TV타워에는 전망대도 있다고 하지만, 투어가이드는 너무 비싸다며 추천해 주지 않는다.
베를린 대성당 앞의 잔디밭에는 드러누워 햇볕을 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낭만적인 모습, 하지만 낭만을 모르는 나.
'저 아이들은 유행성 출혈열'을 모르나? 뭐라도 깔지...'
무슨 행사가 있는지 분장하는 사람들, 멀리서 들리는 스코틀랜드 전통악기 소리...
다시 한번 유럽에 있음이 실감 난다.
그렇게 베를린 돔과 5개의 유명한 박물관이 위치해 있는 박물관 섬(서울의 여의도 같은)을 지나 바다가 없는 베를린에서 만난 도시 비치. Charlie's beach. 근처의 찰리 체크포인트의 이름을 딴 곳인데... 파리 비치부터 느꼈던 거지만, 참 없어 보인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 우리는 누구는 맥주를, 누구는 콜라를, 나는 걷는 내내 눈에 띄어 군침 돌게 만들었던 독일의 소시지를 먹었다. 일명 커리 부어스트 (Curry Wurst.) 소시지 위에 케첩과 카레가루를 뿌린 의외의 조합이지만, 꽤 맛있다.
"이제 투어는 끝이 났어. 내가 도움이 됐다면, 팁 좀 줄래? 안 그러면 우리 회사에서 날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투어 내내 피곤한 기색을 보이던 가이드는 마지막 한마디로 우리의 뒷담화거리가 되어 버렸다.
왠지 헤어지기가 아쉬웠던 우리는 브란덴부르크 문이 위치한 파리지엥 광장의 어느 술집에서 맥주를 한 잔씩 했다. 그곳에서 베를린의 로컬 맥주 베를리너 바이세(Berliner Weisse)를 시켜 마시면서 어제까지도 몰랐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 이 뉴질랜드 커플은 세계 여행을 떠나기 전 남자가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했단다. 8년을 사귀고, 결혼 약속을 한 후 6개월째 세계 여행 중인 이 커플은 아직도 서로를 참 사랑스럽게 쳐다본다. 보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만드는 이 로맨틱한 커플. 반면 호주에서 온 대학생 친구들은 아직도 10대처럼 큰소리를 지르며 논다.
이들과 어울려 브란덴부르크 근처 공원을 어기적 거리며 돌아다니던 중, 호주 친구들 중 한 명이 호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낸다. 암스테르담에서 왔다더니 대마초를 가져왔다. 이윽고 약발이 올라오는지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우리랑 같이 놀자며 미친놈처럼 소릴 지른다.
"Ok."
그의 소리에 같이 놀자며 순식간에 우리에게 합류한 어느 동양인 남자.
"I am from Korea."
"한국이라고요?"
한 달 만에 처음 만난 한국인이 어찌나 반갑던지... 그렇게 만난 친구는 대학교 반수 준비와 입대를 기다리고 있는 나보다 한참 어린 대학생 땡땡이었다. 여행 시작한 지 이제 이틀째인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인종 차별도 당한 것 같고 해서 기분이 별로던 참에 우리를 만났단다.
"근데 누나 얘네들 뭐라는 거예요?"
"몰라, 나도 거의 못 알아들어. 그냥 대충 듣고 말하고 있어."
그렇게 밤거리를 일곱 명이서 싸돌아다니면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처음에 쭈뼛거리던 땡땡이가 서서히 주당의 모습을 보이자 모두가 박수를 쳤다. 맥주를 사서 들고 다니다 메트로 안에서 마셨는데 알고 보니 불법이란다. 이 호주 아이들이랑 몇 시간 같이 있으니 나도 살짝 맛이 가는 듯하다. ^^
더운 여름날 밤 한국에서처럼 슈퍼마켓 앞에 설치된 간이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여기가 한국인지 베를린인지 모르겠다. 매너 좋은 땡땡이는 늦은 밤 누나 혼자 가면 안 된다며 게스트하우스까지 날 데려다줬다. 베를린에서 무얼 본 날이 아닌, 새로 만난 친구들과 정신없이 논 첫 번째 하루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