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국어
수능 성적표는 처참했다.
국어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은 바닥을 기었다.
특히 수학과 암기 과목은 외계어였다. 내 뇌의 구조는 논리적인 수식이나 낯선 문법을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직 한글, 모국어만이 내 뇌에 유일하게 접속할 수 있는 코드였다.
인서울 대학은 당연히 떨어졌다. 재수를 해야 했지만, 우리 집 형편에 월 100만 원이 넘는 기숙 학원은 언감생심이었다. 선택지는 하나뿐.
독학 재수(獨學再修)
말이 좋아 독학이지, 그냥 독서실 구석에 처박혀 혼자와의 싸움을 하는 거였다. 남들은 그걸 고독하고 처량하다고 했다. 도시락 까먹으며 혼자 EBS 강의를 듣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 생애 처음으로 해방감을 맛보고 있었다. 학교라는 감옥, 선생님이라는 간수, 친구들이라는 경쟁자. 그 모든 소음이 차단된 독서실의 적막.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문제집 대신 소설책을 펴들었다. 이유가 뭘까. 여전히 신기한 기억이다.
공부, 공부는 안 한 게 아니다. 못 한 거다.
수학 공식은 튕겨 나가는데, 소설 속 문장들은 스펀지처럼 내 뇌에 빨려 들어왔으니까. 그때 깨달았다. 나의 이 예민한 신경, 4배나 빨리 뛰는 심장, 남들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캐치하는 눈치.
이건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장애물일지 몰라도, 글을 쓰는 데는 축복이라는 것을. 신은 나에게 '숫자'를 뺏어간 대신, '문자'라는 예리한 칼을 쥐여준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교감신경 항진증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 내 길을 찾았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나는 재수생 주제에,
남몰래 노트에 소설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을 새워 스토리를 짰고, 등장인물의 이름을 짓느라 밥 먹는 것도 잊었다.
목표가 바뀌었다.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업?
그런 건 시시해 보였다.
내 꿈은 구체적이고 소박해졌다.
"이 세상 누구라도,
단 한 명만 내 글을 읽고 울어준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내 문장에 위로받아
죽고 싶은 밤을 견뎌낸다면."
"그걸로 내 인생은 성공이다."
그 생각만 하면 입꼬리가 올라갔다.
돈이 없어도, 미래가 불투명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내 마음속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니까.
도서관 구석 자리는 내 집필실이었고,
싸구려 볼펜은 내 지휘봉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실패한 재수생으로 봤겠지만,
나는 그해 겨울, 내 인생 가장 화려한 왕관을 주웠다.
소설가.
그 세 글자가 내 이마에 박히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비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