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악당의 편일 때만 허락된다.

11화 :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가장 비겁한 변명

by 현영강

원고가 길을 잃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함정에 주인공을 밀어 넣고 문을 잠가버렸는데, 막상 이 녀석을 어떻게 살려내야 할지 작가 본인조차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며칠 밤을 끙끙대던 작가는 결국 가장 비겁하고 게으른 탈출구를 선택한다.



우연히 지나가던 조력자가 등장해 주인공을 구해주거나, 때마침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악당의 기지가 폭발하거나, 주인공이 기적적으로 숨겨진 힘을 각성하는 식이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나 쓰이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즉 기계 장치의 신을 현대의 소설에 끌고 오는 짓은 독자를 기만하는 사기극에 불과하다.



독자는 주인공이 그 지독한 미궁을 어떻게 자신의 지혜와 피땀으로 돌파하는지 보기 위해 지갑을 연 것이지, 작가가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을 타고 편안하게 올라가는 꼴을 보려고 책을 편 것이 아니다.



​소설 속에서 우연이라는 장치가 허락되는 유일한 순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연이 악당의 편에 서서 주인공을 더 깊은 지옥으로 처박을 때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길을 걷다 우연히 돈을 주울 수도 있고 우연히 첫사랑과 재회할 수도 있지만, 서사의 세계에서 우연하게 찾아오는 행운은 독자의 몰입을 즉각적으로 박살 낸다.



반대로 주인공이 도망치던 중 우연히 타이어가 펑크 나거나, 숨어있던 옷장의 문고리가 우연히 부서져 바닥에 떨어지는 불행은 독자가 아무런 저항 없이 납득한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올 때 극의 긴장감을 미친 듯이 끌어올리지만, 행운은 철저하게 계산된 인과관계와 주인공의 처절한 희생을 통해서만 쟁취되어야 한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행운이 값싸게 느껴지는 순간, 그 소설이 쌓아온 모든 개연성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만약 주인공을 굳게 닫힌 밀실에서 탈출시켜야 한다면 우연히 바닥에 떨어져 있던 철사를 줍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 철사는 적어도 세 챕터 전에 주인공이 다른 목적을 위해 훔쳐서 구두 밑창에 숨겨두었던 것이어야 한다.



만약 아무런 도구가 없다면, 주인공은 수갑을 풀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엄지손가락 뼈를 부러뜨리는 끔찍한 고통을 지불해야만 그 방을 나설 자격을 얻는다. 승리와 구원은 결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보다 더 잔인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이야말로 소설의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무겁고 절대적인 진리다.



작가가 주인공을 불쌍히 여겨 위기의 순간에 몰래 쥐여주는 그 알량한 행운의 열쇠가 사실은 서사의 목을 조르는 가장 치명적인 독약임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원고를 펼쳐 주인공이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들을 냉정하게 해부해 보라. 만약 그 탈출 과정에 당신이 개입하여 상황을 편하게 조작한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당장 그 우연의 요소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려라.



그리고 주인공을 다시 그 어둡고 차가운 함정 속으로 밀어 넣은 뒤, 그가 온몸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 바닥을 박차고 기어 올라오게 만들어라. 그 처절하고 짐승 같은 발버둥만이 독자의 심장을 때리고 카타르시스를 폭발시킬 수 있다.






신의 자비를 기대하지 마라.

소설 속에서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알량한 동정심이 아니라,

오직 주인공의 처절한 피와 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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