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는 저축되지 않는다.

21화 : 가난이 걸러낸 인간관계의 서늘한 민낯

by 현영강

나름대로 베풀며 살았다고 자부했다. 먼저 지갑을 여는 쪽이었고, 누군가 억울하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하면 밤잠을 줄여가며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적은 액수라도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는 지인들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해 본 기억이 없다. 그게 사람 사는 정이고, 언젠가 내가 바닥에 넘어졌을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보이지 않는 안전망이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내 인간관계라는 이름의 통장에 아주 성실하게 선의를 적금 붓듯 납입해 왔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청구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날아왔다. 내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당장 내일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뼈저리게 필요해진 순간, 그 견고해 보였던 안전망은 일순간에 공기 중으로 증발해 버렸다.



특히 그것이 금전적인 도움일 때, 사람들은 마치 짠 듯이 모세의 기적처럼 썰물 빠지듯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수백 번 망설이고 자존심을 짓이기며 조심스럽게 보낸 메시지들은 숫자 1이 지워진 채 며칠째 묵묵부답이거나, 구구절절한 변명으로 돌아왔다. 나도 요즘 너무 힘들어, 대출 이자가 올라서, 이번 달은 마이너스라서. 그들의 사정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삶은 언제나 본인에게 가장 무겁고 버거운 법이니까.



하지만 그 서늘하고 정중한 거절의 문장들 앞에서 내가 느낀 것은 배신감이 아니라, 내 순진함에 대한 처절한 자괴감이었다.



​인간관계에서 오고 가는 호의는 결코 은행 예금이 아니다. 내가 백을 주었다고 해서 백을 돌려받을 수 있는 정량적인 거래가 성립하지 않는 세계다. 사람들은 내가 베푼 친절을 이자가 붙는 부채로 여기는 대신, 그저 운 좋게 주운 길거리의 동전처럼 가볍게 소비하고 잊어버린다.



돈이 얽히는 순간, 십 년을 함께 웃고 떠들었던 우정은 종잇장보다 얇은 민낯을 드러내며 산산조각이 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입을 떼는 행위는, 사실상 그 관계의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 벌이는 잔인한 러시안룰렛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제 아무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어려울 때 나를 돕지 않는 그들이 매정한 것이 아니라, 위기가 닥치면 누군가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내 오만함이 문제였을 뿐이다. 애초에 내가 베풀었던 것들도 언젠가 돌려받기를 은연중에 계산했다면, 그건 더 이상 순수한 선의가 아니라 아주 얄팍하고 실패한 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가 승률 제로의 도박을 걸어놓고 혼자 억울해하는 꼴이었다.



​지금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적막하고 차가운 이 고립 속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완벽한 단절과 버림받음이 나를 묘하게 안도시킨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답장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휴대폰 화면을 만지작거릴 필요도 없고, 비참하게 내 가난을 전시하며 알량한 동정을 구걸할 필요도 없다. 이 바닥 없는 가난은 내 인생에 잔뜩 끼어 있던 거품 같은 인연들을 단숨에 걷어내 준 가장 가혹하고도 정확한 필터였다.



​텅 빈 통장과 싸늘하게 죽어버린 주소록을 번갈아 보며 나는 씁쓸하게 웃는다. 결국 인생은 철저한 독고다이다.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으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이 지독하고 차가운 진리를 깨닫는 데 지불한 수업료치고는 꽤 값비싸고 쓰라리지만, 덕분에 나는 이전보다 훨씬 건조하고 단단해졌다. 아무도 없는 이 텅 빈 무대 위에서, 나는 기대고 구걸하는 짓을 멈추고 다시 묵묵히 내 살을 깎아 활자를 지을 것이다.



아주 많이,,,

힘이 드는 하루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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