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소설이 허락해 주는 것은

18화 : 개연성이라는 폭군의 통치법

by 현영강

원고를 합평하거나 피드백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가장 흔하게, 그리고 가장 뻔뻔하게 튀어나오는 변명이 하나 있다. 원고 속의 특정 사건이 너무 작위적이고 우연에 기대고 있어 전개가 억지스럽다고 지적하면, 작가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한다.



이거 진짜 제 지인한테 일어났던 실화인데요, 어제 뉴스에도 똑같은 사건이 나왔었는데요. 작가는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소설 속에서도 당연히 완벽한 리얼리티를 확보했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픽션이라는 장르의 본질을 철저하게 오해한 끔찍한 착각이다.



현실은 미쳤고 아무런 규칙 없이 무작위로 돌아가지만, 소설은 철저하게 미치지 않은 척을 하며 정교한 인과율의 톱니바퀴를 굴려야 하는 가장 지독하고 이성적인 거짓말의 세계다.



​현실에서는 출근길에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평생 착하게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기괴한 사고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현실 세계의 창조주는 인간에게 사건의 개연성을 설명해 줄 의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창조한 소설의 세계에서 작가라는 신은 독자에게 모든 사건의 인과관계를 증명하고 뼈저리게 납득시켜야 할 무거운 의무를 지닌다. 주인공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화분을 맞고 쓰러지는 전개를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라며 원고에 우겨넣는 순간, 독자는 자신이 지불한 시간과 몰입을 기만당했다고 느끼며 가차 없이 책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소설 속의 모든 죽음과 기적, 그리고 파국은 철저하게 계산된 서사의 맥락 위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필연적인 결과물이어야 한다. 진짜보다 더 완벽하게 진짜 같아야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이름의 사기극이 짊어진 가혹한 숙명이다.



​독자는 소설을 펼치는 순간 이 이야기가 모두 지어낸 가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당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주겠다는 암묵적인 계약서에 서명을 한 상태다.



이 계약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유일한 조건은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세계의 법칙과 인과율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배신하지 않는 것이다. 살인마가 주인공의 목을 조르는 숨 막히는 클라이맥스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져 악당의 머리를 박살 내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비록 나사에서 발표한 실제 운석 추락 사건을 팩트로 삼았다 한들, 독자는 그 허접하고 얄팍한 결말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기괴하고 파격적인 사건을 서사에 끌어들이고 싶다면, 그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지독하고 촘촘한 복선과 심리적 기저를 원고의 첫 장부터 아주 치밀하고 은밀하게 바닥에 깔아두어야만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독자가 납득하는 개연성이란 사건의 물리적인 확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심리적인 타당성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평범하고 소심한 회사원이 갑자기 연쇄 살인마로 돌변하는 억지스러운 둔갑술을 부리지 마라.



대신 매일 짐짝처럼 실려 가는 만원 지하철에서 겪는 모멸감, 폭력적인 상사의 멸시, 숨통을 조이는 텅 빈 통장 잔고가 수년간 겹겹이 쌓여 그의 교감신경을 서서히 갉아먹고 이성을 붕괴시키는 그 끔찍한 마모의 과정을 집요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 처절한 심리적 붕괴를 숨죽여 지켜본 독자는, 그 회사원이 마침내 서랍에서 식칼을 꺼내 드는 순간 그것이 현실에서 벌어지기 힘든 극단적인 범죄일지라도 완벽한 개연성을 갖춘 필연적인 비극으로 묵묵히 받아들이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 아니라,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의 인과율을 조립하는 것이 작가의 진짜 임무다.
​당신의 원고를 펼쳐 가장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지점을 서늘한 눈으로 의심해 보라.



만약 그 사건의 정당성을 현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구차하고 옹색한 변명으로밖에 방어할 수 없다면 당장 그 장면을 도려내어라. 현실 세계의 무질서를 핑계로 서사의 개연성을 포기하는 것은 작가로서 내리는 가장 비겁한 항복 선언이다.



현실은 인과율이 없어도 잔인하게 잘만 굴러가지만, 당신의 소설은 촘촘한 개연성 없이는 단 한 페이지도 숨을 쉴 수 없는 나약한 구조물이다. 현실의 기괴함을 핑계 삼아 당신의 게으름을 포장하지 마라.




오직 치밀하게 계산된 필연의 사슬로,

독자의 이성을 빈틈없이 옭아매는,

독종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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