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멱살

24화 : 수동적인 캐릭터

by 현영강

주인공을 지독하게 학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가학적인 글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하늘에서 갑자기 거대한 불행이 떨어지고, 가족은 몰살당하며,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주인공은 그저 바닥에 엎드려 피눈물만 쏟아낸다. 작가는 주인공이 겪는 이 압도적인 비극에 독자가 연민을 느끼며 몰입할 것이라 착각하겠지만, 단단히 틀렸다. 독자는 불행의 파도에 무기력하게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징징거리는 나약한 샌드백에게 단 1초도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때리면 맞는 수동적인 인물은 독자의 하품만 유발할 뿐이다. 사건이 주인공을 덮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기어이 사건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만 진짜 서사가 폭발한다.



​서사를 맹렬하게 끌고 가는 유일한 엔진은 주인공의 능동적인 '선택'이다. 그것이 아무리 멍청하고 파멸을 앞당기는 최악의 악수일지라도, 주인공은 기꺼이 그 폭탄의 스위치를 스스로 눌러야만 한다.



악당이 쫓아오니까 그저 비명을 지르며 도망만 치는 주인공은 삼류다. 진짜 압도적인 주인공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기어이 뒤를 돌아 악당의 발목을 물어뜯고 상황을 더 끔찍한 지옥으로 처박아버리는 통제 불능의 미친개여야 한다. 상황에 질질 끌려다니는 자는 주인공이 아니라 불행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플롯이 주인공의 등 떠밀어 억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지독한 결핍과 이기적인 욕망이 플롯의 멱살을 쥐고 미친 듯이 흔들어대야 한다.



​주인공에게 알량한 도덕성이나 선량한 피해자라는 무해한 완장을 채워주려 애쓰지 마라. 완벽하고 불쌍한 피해자는 저녁 뉴스 사회면에서나 필요한 개념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자신의 맹목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꺼이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고 위험한 선을 넘나드는 결함투성이의 괴물이어야 한다.



세상이 자신을 짓밟았으니 억울하다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대신, 바닥에 굴러다니는 깨진 유리 조각이라도 주워 들고 세상의 배때지를 쑤시겠다고 덤벼드는 그 서늘하고 독기 어린 눈빛이 독자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든다. 주인공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그 무모함과 처절함으로 독자를 경악하게 만드는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원고를 펼쳐 주인공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들을 아주 서늘하고 냉정한 눈으로 해부해 보라. 만약 그가 그저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기다리거나,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떠밀려 의미 없는 리액션만 반복하고 있다면 당장 그 나약한 녀석의 뺨을 후려갈겨라.



그리고 기어이 무언가를 지독하게 욕망하게 만들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제 손으로 직접 파멸의 문고리를 비틀어 열게 만들어라. 독자는 가엾은 희생양을 보려고 지갑을 열고 밤을 새우지 않는다. 피투성이가 된 채 헐떡이면서도 기어이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물어뜯는 독종의 탄생을 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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