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가난은 그녀를 철들게 했다

역사의 구전

by swimmming



엄마는 오 남매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 둘에 딸 셋인 집이었고 일곱 살 터울의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집안의 막내였다. 능청스럽게 자화자찬하여 매번 듣는 이로 하여금 야유하게 만들었지만 스스로 말하길 정말 착했었단다. 외할아버지가 제대로 집에 돈을 벌어오지 못하시는 살림에 외할머니가 야채를 이고 시장에 나가 힘겹게 장사를 하여 일곱 식구가 풀칠이라도 하고 살았댔다. 엄마는 초등학생 때 성인용 자전거를 낑낑 몰고 외할머니의 짐을 조금이나마 실어 나르곤 했었다. 엄마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그렇게 했다나. 가난은 어린아이를 철들게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외할머니와 엄마를 비롯한 친척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외할아버지는 인물 좋고 사람 좋고 풍류를 즐길 줄 알지만 딱 하나 돈을 못 벌어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셨다고 한다. 구 형제 중 맏이도 아닌데 유일하게 공부를 시켰을 만큼 똑똑하고 잘생겨서 꽤나 유명인사였다고. 중요한 글을 써야 할 때면 사람들이 부탁하러 오고 글자를 참 잘 쓰셨다는 게 엄마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노래도 잘 불러서 인기 만점이었다나.


외할머니는 지금도 치를 떠시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고 했다. 좋은 남편은 아니어도 좋은 아빠이긴 하셨나 보다. 허나 어려운 시대에 돈을 못 벌다 못해 가난한 다른 형제들에게 없는 살림이 뜯기는 건 치명적인 가난을 낳는 꼴이었다. 먹을 건 없는데 먹을 입은 많아 한가득 사 오는 대로 없어지기 바빴다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 첫째 딸이 먹을걸 앞에 두고 미적대는 꼴을 엄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하교하고 집에 왔는데 시장 구석에 있던 작은 집이 갑자기 사라져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아침에 나섰던 집을 포클레인이 밀어버렸다. 재개발이었는지 불법건축물이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루아침에 길에 나앉게 된 그날의 일이 뇌리에 박혔다고 얘기했었다. 가난해서 생기는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엄마는 가난한 집의 조용하고 착한 넷째 딸로 컸고 대학을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 큰 처녀'가 되었다.


한동안 엄마는 큰 이모 댁에서 지내며 사촌오빠가 운영하는 약국에서 알바 비슷한 것을 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일에 대해 서로의 기억이 다르듯, 엄마와 외할머니의 회상은 각기 다르지만 엄마의 주장에 따르면 집이 먹고살기 힘든 와중에 입을 조금이나마 줄일 겸 그 당시 나름 풍족한 큰 이모 집에 잠시 얹혀살았었단다. 약국에서 일하며 조금이나마 뭔가 불편하면 손에 잡히는 대로 약을 먹고 연고를 발랐는데 그게 나중에 부작용이 되어 돌아온다는 걸 느낀 이후로 약을 먹는걸 참 싫어했었다.


내내 가난하고 복작거리는 집에서 살아오다 처음으로 넉넉한 분위기의 큰 이모 댁이 좋았었는지 엄마는 그때의 일을 가끔 얘기하곤 했다. 큰 이모 댁에서 느낄 수 있었던 평화로운 분위기의 저변에는 교회를 다니던 신앙이 깔려있었고 엄마도 자연스럽게 종교를 접하게 된다. 본가에선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분위기에 엄마는 조용하고도 꾸준하게 교회 문을 드나들었던 것 같다. 어찌나 좋았던지 기독교가 아닌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었다.


이후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큰오빠가 결혼을 했는데 새언니가 미용실을 운영해 좀 도와주며 미용일과 연이 닿았다. 꽤 할만하다 싶어 어깨너머로 커트나 펌 하는 방법을 배워가며 연습하고 학원을 다니며 미용자격증에 응시해서 당당히 취득했다. 당시 합격자를 벽보로 붙였는데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찾으면서 어찌나 떨렸는지 몰랐었다고 했다. 이름을 발견하자 공중전화로 외할머니에게 전화하며 방방 신나게 뛰었다고도 했다. 어딘가 응시해서 합격해본 엄마는 자신감이 붙었고 미용사로 일을 하며 콧대 높은 멋쟁이 커리어우먼이 되었다. 자기의 실력으로 처음 벌어본 돈은 큰 기쁨이었다. 그렇게 번 돈의 대부분도 집안 살림에 보태며 집에 힘을 실어주는 착한 딸이기도 했다.


내내 가난했던 엄마는 돈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돈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남자와 결혼했다. 가난해봐서 없이 산다는 게 지독히 힘들다는 걸 알았어도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현명함이 있었나 보다. 물론... 엄마 눈에 아빠가 잘생겨서 그렇기도 했겠지만(요즘 엄마한테 아빠가 왜좋아? 라고 물어보면 잘생겨서! 라고 한다) 어쨌든 가난은 결혼 후에도 한동안 엄마를 따라다녔다. 그 녀석을 떨쳐내기까지 엄마는 참 여러 가지 일을 했었다. 그리고 참 알뜰살뜰 살기도 했다.


시장에 가서 천 원이라도 깎고, 사은품 하나라도 더 받아오고, 언젠가 쓸 일이 있을까 하여 물건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습관 같은 건 다 그때에 기인한 것들이겠지. 한 번은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에게 알뜰한 거랑 구질구질 한 건 다른 거야! 하고 핀잔을 준 적이 있는데.. 사실 그렇게 엄마가 가난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은 먹고 싶을 때 먹고 필요한 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고마움을 표현했으면 좋았을걸 이라는 생각이 오래오래 떠나지 않았다.


가난은 너무 빨리 왔고 후회는 항상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