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에는 깐 달걀님들이 계신다.
전기 매트로 인해 등은 따시고 차분한 비트의 음악이 잔잔하게 들려오는 이곳. 이 방 밖에서의 바쁜 목소리, 발걸음과 상관없이 나는 지금 세상 편안한 자세로 아주미들이 누릴 수 있는 사치의 끝이라는 내 들숨 날숨에 집중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앞으로 나에게 닥칠 일을 기다리고 있다. 한참을 누워 있으려니 심심해져 핸드폰을 찾아 충전하기 위해 윗몸을 일으키려 꿈틀대자마자,
"핸드폰 충전해 드려요?"
누군가 다가와서 0.1초 만에 핸드폰은 내가 누운 상태에서 가장 보기 편한 각도로 돌아와 있다.
맞아. 이랬었지. 한국식 서비스.
대한민국에 살지 않는 700만 해외동포들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비스는 정말 세계최고다. 서비스업에 종사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받는 입장일 때는 몰랐다가 외국에 산 시간이 오래될수록 (특히 너 유럽!) 자본주의 미소와 친절이 너무 황송하고 그 프로페셔널함이 경의롭기까지 하다. 님들 쫌 인정!
그나마 스위스는 사람들이 순해서 퉁명스럽기보다는 수줍어한다는 느낌이 강한데, 그래도 어디를 가든 점원과 나의 관계란 통상적인 인사와 필요한 일처리 외 감정적인 교감이 오가는 경우는 드물다.
반대로 어제 이태원의 소품가게에서 내가 원하는 인센스 향을 찾던 점원이 없다는 소식을 전하며 지은 나라 잃은 표정은 진심으로 나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단 말이다! 내가 샌들우드향 인센스를 못 사는 게 그녀의 인생 최대오점이라는 듯한 그런 진심 어린 표정 그렇게 하면 이 아주미 자꾸 감동한다?!
아, 그렇구나. 나 고객님이구나.
등따신 이곳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는 청담동 피부과 고. 객. 님.
한국은 인터넷 강국, 콘텐츠 강국에 이어 외국에서는 뷰티 강국으로 통한다. 우리 동네의 애들 엄마 집단에서도 나의 한국 방문은 그런 의미에서 부러움을 산다.
나 좀 데리고 가라는 사람부터(가자면 따라나설 사람들이라 하핫; 하며 대답을 피했음), 어디서 검색한 올리브영의 무슨 제품을 사다 주면 안 되겠냐고 돈을 쥐어주는 사람까지. 이 작은 스위스 마을에까지 한국의 뷰티 상품들이 소문 다 났다.
그럴 만도 하다. 긴 비행을 마치고 호텔로 가는 차 안의 씻지도 자지도 못해 푸석하고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내 행색과 달리 강남을 들어서는 순간, 거리에는 깐 달걀 미남미녀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전방 30m 깐 달걀님 출몰입니다.
저기 커피사고 계신 여자 두 분. 두 분 다 깐 달걀님 되시겠습니다.
혼자 쇼핑 중이신 여성분. 깐 달걀 임명하겠습니다.
반갑다, 친구야. 엇, 너도 깐 달걀이구나!
서울 강남은 우리 엄마, 언니, 친구, 낯선 사람 할 것 없이 다들 뽀얗고 티 없는 마치 삶은 달걀을 까놓은 모습으로 은은한 빛을 내며 거리를 활보한다. 예전에는 로고가 있는 명품가방과 신발, 손에 쥔 달랑거리는 차키로 있어 보이려 했다면 요즘은 좋은 원단의 라운지 웨어, 질이 좋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거 무슨 브랜드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나만 아는 브랜드의 가방, 깨끗한 운동화가 대세인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 하지만 그런 그들 사이에도 레벨이 있었으니, 상위 포식자는 단연 피부과 다니는 티 나는 깨끗한 피부를 가진 깐 달걀님들이셨다.
이쯤에서 우리 집 두 여자들, 사루비아님과 나의 친언니 깐 달걀님께서 나를 피부과로 내몰았다.
유럽의 문화에 젖어 내 안에 멜라닌 색소도 충분하면서 해만 나면 비타민 D를 좇아 광합성을 해댄 대가를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서 치를 줄이야!
청담동의 피부과는 결혼 전부터 가본 적 있는 친숙한 곳. 은은한 음악, 친절한 깐 달걀 직원과 원장쌤이 있는 세상과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무중력상태의 오아시스이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내 얼굴의 잡티와 모공을 없애기 위한 계획적이고 프로페셔널한 전투가? 시작된다. 첨단 시술 기구며 시술을 받으시는 미래의 깐 달걀(저요, 날달걀쯤 되려나?) 시술 중 몸의 온도가 올라가는 걸 방지해 등허리에 얼음주머니를 붙이는 치밀함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군무를 보는 느낌이다.
왜 시술 중 몸의 온도가 올라가? 의문이 들었다면 당신은 피부과 시술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임이 확실하다. 수많은 신경들이 집중되어 있는 얼굴에 딱 화상 입지 않을 정도의 레이저를 쏘거나(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부분 부분 나눠서 약 2-30번!) 바늘로 찔러 피부에 수많은 구멍을 내 피부 재생을 이뤄내는 마이크로 니들링... 등등 시술받고 있자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나도 모르게 두 손 꽉 쥔 깍지에 피가 안 돌아 간호사선생님이 손에 힘 풀라고 얘기할 정도의 아픔. 깐 달걀 군단 모두가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아무것도 없다!
이곳의 원장님은 20대 결혼 전부터 봐 온 나의 친언니의 친구이다. 지식인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며 수수하지만 귀해보이는 이미지에 할 말은 한다! 강단도 있어 보이는 멋진 사람이다.
전에 유학생시절,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 언니가 나를 멱살 잡아 이 언니 앞에 갖다 놓았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차피 다시 거기 가면 햇빛에 나다닐 거잖아.(맞아요, 정답) 뭔가를 하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아. 피부 정리랑 가벼운 레이저 한방 쏴줄 테니 그거나 하고 가."
가벼운 치료를 했었던 터인데, 그 후로 시간이 흘러 나도 중년의 주름이 생기고 기술도 좋아져 일 년에 한 번만 해도 되는 시술이 보편화되자 이번에는 뭔가를 해보자. 나에게 써마지와 더블리프팅이라는 과제가 안겨졌다.
시술 과정은 아까 말한 등허리에 땀이 흥건히 젖을 정도의 긴장과 아픔을 견뎌내야 하지만, 온 얼굴에 바늘구멍이 생기고 피가 맺힌 공포 영화에나 나올법한 내 얼굴을 보고 며칠 후에 있을 술약속에 한숨이 푹푹 나오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고객님의 편의와 덜 아픔(?)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료진의 배려와 깐 달걀에 한 발짝 가까이(찐 달걀 정도?) 다가왔다는 사실에 차가운 재생팩을 얼굴에 얹고 있는 이 순간이 평온하다.
시술 후 회복을 위해 누워있으면서 내 몰골을 찍어 스위스에 있는 우리 애들 학교 친구 엄마들, 애친엄(이상하게 애들 친구 엄마들은 내 친구가 되어도 꼭 이렇게 부르게 된다)에게 보냈다.
다들 난리가 났다.
"와우! 나도 하고 싶다!"
"한국 다음에 갈 때 같이 갈래!" (묵묵부답...)
"Love it!!!!!!!!"
뭐 이런 대답들이 돌아왔다. 아파 죽겠는데 반응들 보소.
내가 얼굴에 바늘 찌르고 레이저 쏘고 재생크림 사서 바르고 이랬다가저랬다가왔다갔다 하는 과정을 묵묵히 옆에서 지켜보며 피부과에서의 결제액을 보고도 눈 한 번 질끈 감을 뿐 아무 얘기 없던 남편에게 며칠 후에 물었다.
"나 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남편들이 제일 무서워한다는 그 질문)
"그전이랑 똑같이 예뻐. 그런 거 안 해도 돼."
남편, 그 대답이 툭 치면 AI처럼 나와야 하는 정답이 맞긴 한데, 이젠 나도 관리가 필수인 나이가 되었어. 햇볕에 당당히 쏘다니는 만행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랄까?
"그런데, 정말 한국 사람들이 외모에 더 신경을 쓰는 건 맞는 것 같아. 거리에 다니는 남자들도 스위스에 비해 훨씬 정돈된 쌔끈한(polished) 모습이야.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외모에 신경을 쓰는 거야?"
"그.. 그러게? 예쁘면 조.. 좋잖아"
대충 대답을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왜 우리는 외모에 이렇게 목숨을 거는 것일까?
잠시 스위스의 내 주위의 사람들과 한국의 깐 달걀님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유럽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피부톤, 눈색깔 그리고 머리색이 다르다.
엄마는 파란 눈에 금발인데 아이는 갈색 눈과 갈색 머리인 경우가 그리 이상하지 않게 자주 있으며, 유치원에 들어가서도 내 친구 알리나는 금발이고 테오는 빨간 머리이며 사춘기에 들어서서는 금발이던 아까 그 알리나의 머리색이 갈색으로 변하기도, 직모였던 테오의 빨간 머리가 곱슬로 변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접했던 아이들은 너는 너, 나는 나. 각자의 생김새를 존중하며 틀림이 아닌 다름을 배운다. 물론 이 속에서도 아이들끼리 자기들 눈에 더 이쁜 생김새가 있기도 하고, 수적으로 열세한 동양인 아이가 집에 와서,
"엄마, 나는 언제 머리 노래져?"
라고 묻는 일도 있지만(저요..), 우리 애들 학교에서도 다양성을 존중하며 무지개 색깔의 피부를 가진 코끼리 엘머라는 캐릭터가 등장해 (이 코끼리 이야기 아시는 분?) 사람은 다들 나름의 생김새와 재주를 가졌다는 주제를 꽤 일찍부터 가르쳐왔다. 이곳에서는 누군가를 묘사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머리와 눈의 색깔인데,
보통 그 왜 밝은 갈색머리에 초록눈 아이 있잖아. 유남생? 이렇게 묘사되곤 한다.
그에 비해 동양인들은 머리, 눈동자, 피부색이 서로 비슷하므로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주는데,
그 얼굴 동그랗고 다리 짧은 애 있잖아. 숏다리! 혹은,
걔 몰라? 얼굴에 여드름 많이 난 애.
이런 식으로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치부를 굳이 꼬집어주는 쓸데없이 자세한 게 나의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에 사람을 묘사하는 방법이었다. 내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으로 동양인들이 서양인들보다 치밀하고 섬세한 작업에 우수한 장점이 있는데 그렇게 우리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나와 너의 외모를 비교하고 지적질해 가며 보완하고 업그레이드하여 서로 비슷한 종자들끼리 눈 모양이 더 더 이쁘게, 피부는 더 더 깨끗하게, 머리는 더 더 윤이 나게... 사회가 정한 궁극의 아름다움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건지도(지구는 둥그니께). 그 길 끝에는 태. 혜. 지가 있었다 한다. ㅎㅎ
그 결과, 뷰티 강국이라는 타이틀도 얻고 한류의 일환으로 산업으로 발전시켜 외화를 벌어들이게 되었으니 경사인 건가?
확실한 건, 스위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외모에 대해서만은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인으로 살다가 다음 한국 방문 일주일 전부터 또 오마이, 뭐라도 좀 해야겠다며 요즘 좋다는 시술이 뭔가 인터넷을 뒤지겠지. ㅎㅎ
그래서, 깐 달걀로 거듭났냐고?
뭘 모르시네. 이 써마지라는 게 장기전이라고 시술 후 드라마틱한 효과보다는 앞으로를 위한 보험이라는 사실! 밑줄 쫙.
찐 달걀님이 로그아웃 하셨습니다.
이상, 저의 브런치북 이제 한번 돼볼까, 스위스인?
30화로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스위스 아주미는 여전히 스위스인이 되지 아니하고 한국 여권을 끌어안으며 못 잃어, 나의 조국!이라고 허공에 대고 외치고 있다는 소식 전해 드립니다.
보통의 별 탈 없는 하루를 보내셨길 바라며 그럼, 난 바빠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