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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아빠는 결혼 안 했어.

헉! 왠열보다는 응, 그렇구나.

by 스위스 아주미

논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변명을 하자면 그날 나는 배가 몹시 고팠다. 줄줄이 이어진 저녁 연주에 늦어진 식사타임, 그밖에 여기저기서 이웃들과의 술 한잔 타임에 아, 작작해야지 싶어 전날 끓인 마녀수프가 문제였다. 친한 이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를 앞두고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레스토랑에서 맛난걸 많이 먹으리라는 큰 뜻을 품고 점심을 마녀수프로 가볍게 먹었는데 그게 너무 가벼웠나? 친구들과 만난 저녁 7시쯤 나는 스니커즈 광고에 나오는 배고픈 사자가 되어 있었다. 헝그리를 넘어선 Hungry와 angry를 합친 hangry 상태. 그러게 점심 좀 든든히 먹지 왜 마녀수프만 먹어 가지고.


약속시간이 되어 하나 둘 모인 우리는 오랜만에 자유부인 신분인 자신들을 위해 축배를 들며 이런저런 얘기로 근황을 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친구들이 모이면 의례 거론되는 사회적/정치적 이슈들. 그중에서 그날은 최근에 비혼 출산으로 화제가 되었던 유명 배우와 모델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뭔가 안 봐도 예상되는 댓글 현황이었지만 인터넷상에서 역시나 벌써 배우 J 씨는 몹쓸 사람이 되어있었고, 갓 태어난 그의 아들은 '혼외자' 레이블을 획득한 이후였다.


흠, 내가 이상한 건가?

임신시켜 놓고 결혼하자니 안 한다는 배우 J가 행실이 안 좋고(이것은 나는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아이가 불쌍하다고 하는 나의 친구들의 의견에 반론을 펼쳤다.

"사랑하지 않는데 애가 생겼다고 결혼을 꼭 해야 해? 그렇다고 애가 행복할까? 애 엄마가 애를 낳았을 때는 본인이 원해서였을텐데 인연을 끊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빠로서 책임을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관련된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위한 최선책이라고, 간절했던 생각은 아들, 딸 구별 말고 성교육 잘 시키자. 뭐 이 정도?


"그래도 애가 불쌍하잖아."

"뭐가 불쌍해, 엄마가 톱모델이고 아빠가 정우성인데 잘 살겠지. 보태주지도 않을 남 걱정 할 시간에 본인들 노후준비나 하라 그래!"


... 아.. 폭주했다.


그 이후로 나의 친구들은 쟤, 왜 저러니. 밥 좀 줘라. 마녀 수프 먹더니 애가 마녀가 됐다며 ㅎㅎ

우리는 그렇게 웃으며 그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날 집에 와서 그다음 날까지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나의 측근 T 언니에게 문자로 물었다.


난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언니 내가 이상한 거예요?

네가 유럽에 오래 살았지.


흠..


오해는 일단 풀자. 나는 전통적 결혼제도를 지지하고 나의 딸들도 그런 절차를 밟아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가족이 있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그 부모는 둘째치고 갓 태어난 아이에게 '혼외자', '불쌍한 애'라는 타이틀을 씌우는 게 그 아이를 위하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 아이들 친구 중에는 엄마가 20살 때 잠깐 만난 남자와 가진 아이를 낳아 그녀의 친정 부모가 부모처럼 아이를 지극 정성으로 키워 엄마와 성씨가 같은 아이도 있고, 부모가 결혼을 안 한 상태여서 법적으로 부부가 아닌 동거인인 경우, 부모가 이혼해서 주말에만 한쪽 부모를 만나는 아이.. 등등 여러 형태의 가족이 있다. 우리나라였으면 쉬쉬했을 텐데 이 아이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듣는 사람도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호들갑 없이 자연스레 넘어간다.


어른들의 사정과는 별개로 그 아이들에게 어머, 웬일이니 너 너무 안 됐다.라는 반응보다는

응, 그랬구나. 그럴 수 있지.

하는 약간의 무관심이 더 힘이 되지 않을까?

부모가 어떻든 너의 앞날은 찬란하게 빛날 수 있어!라는 의미를 담은 무관심 말이다.


모르겠다. 내가 이상한 거 맞는지도. 마녀 수프 먹고 마녀가 된 게 맞을지도.


좀 다른 이야기로 스위스의 결혼을 하지 않은 커플들의 그 수많은 이유 중에 매우 스위스스러운 이유가 하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결혼한 부부가 동거상태의 커플보다 소득세 부담이 크다. 혼인 신고를 하는 순간 개별 두 사람의 소득을 합산해 과세하는데 이 합계가 두 사람이 각각의 소득에 대해 따로 세금을 내는 동거 커플보다 보통은 높아서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징벌적 세금이네 말들도 많은데 우스갯소리로 결혼한 커플들이,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그 어려운 일을 우리가 했네..

당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중과세도 기꺼이 내겠으니 나와 결혼해 주겠소. 뭐 이런 농담이 오고 간다.


그럼, 맞벌이 부부란 이유로 동거인 커플에 비해 세금을 쬐끔 더 내야 하는 관계로 난 이만 돈 벌러 가야겠다. 이 땅의 모든 커플을 위해 저녁에 축배를 들면서(내가 왜?) 배우 정 씨의 아들의 탄생을 축복(아가야 환영해)도 해야겠다. 난 바빠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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