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자리, 그 흔적에게 묻다.
다음 해의 평온을
자신하지 못하던
12월의 늦은 밤이 있었다.
이제는 그 늦은 밤을
조금은 다른 생각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장담하지 못했던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때의 나를 다시 읽고 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지만,
생각은 더 잦은 두려움과
정리되지 않은 혼란 속에 있었다.
아내의 노후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아빠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남길 공백은 얼마나 클지,
자식의 아픔을 바라봐야 되는 부모의 마음까지.
그리고 내 소식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에 또 어떻게 다가갈지.
암 진단을 받던 그날의 믿기지 않던 기억,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들,
수술을 기다리던 날들,
잠든 척 서로의 깊은 한숨을 소리 없이 감추던 밤들,
그리고 부은 눈을 애써 웃음으로 감추던 아내의 아침.
멈춰버린 공간과 감정 속에서
나는 시간을 계산했고,
생각은 어느 순간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날의 날짜,
병실의 공기,
창밖의 풍경,
그리고 가족의 얼굴들.
그 이후 이어졌던
생각의 정리들까지.
이 일기들을 쓰기 전의 나는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을 붙잡기보다는
‘이후’만을 고민하며 살고 있었다.
삶은
늘 다음 페이지에 있을 거라 믿었고,
오늘은 그저
넘겨야 할 장처럼 취급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일기가
지금의 나를
여기 이 자리까지 데려온 것은 아닐까,
잠시 멈춰 생각해 보게 된다.
그날 이후로
하루는 더 이상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일,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것.
그 모든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평범함 위에
무심히 서 있었는지를.
늘 곁에 있던 사람들,
아무 생각 없이 반복되던 일상,
굳이 감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순간들.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앞에서
그것들은 갑자기
전혀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
'평범이라는 특별한 이름'
이 일기들은
그 시절의 내가
무언가를 잘 써보려 애쓴 기록이 아니다.
그저 그날그날 스쳐 지나간 생각과 마음이
흘러간 자리들.
가족과 나를 위해 남긴 작은 끄적임 들이며,
제대로 느끼지 못한 하루를
뒤늦게 붙잡아보려던 흔적에 가깝다.
‘살아간다’는 말 뒤에 숨겨두었던
‘살고 있다’는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적어 내려간 메모들.
7년이 지나
이 문장들을 다시 펼치게 된 이유도
아마 그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여전히 하루는 바쁘고,
여전히 삶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하지만,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나는
'어쩌면 이 암은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그때의 울림으로 깨우친 것들을
놓친 채 지나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다시 옮겨 본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다고 여겼던 하루를
다시 느끼기 위해.
이 일기들은
과거를 정리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어쩌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다시 건네는
조용한 주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