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날 (2018.11.28. 수요일 초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
매년 이 날이면
아내와 함께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을 다시 걷는다.
올해는
그 길의 공기가
고마움을 더한 깊이로 느껴진다.
지난 몇 달,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지나고 나니
처음이라는 장면이
어쩌면
가장 깊은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전철역 이름은 바뀌었고,
처음 서로를 마주 봤던 가로등은
오래전 사라져 버렸지만,
이 길의 공기만은
여전히 그날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쯤이었지?”
“응, 가로등이 이쯤이었어.”
짧은 대화 속에
스물다섯 해가 접혀 있다.
오늘은
내가 전철 안에서
한눈에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따라 내렸던 날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평생의 시작이 될 줄은.
1993년 11월 28일.
밤공기가 깊고 차가웠다.
숨을 깊이 들이쉬면 코 끝이 시린 그런 날.
겨울의 문턱에 선 공기에는
외로움과 설렘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동아리 친구와 종로 시장 골목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강변가요제에서 떨어진 뒤
맡겨두었던 악보를 받아온 날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세상에 대한 욕심보다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던 나이였다.
전철 안은 적당히 붐볐고,
소음과 지하철의 진동 속에서도
묘하게 고요했다.
자리를 찾던 그때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통 넓은 청바지,
검은 사파리 재킷,
창밖을 바라보던 눈빛.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선이 자꾸 머물렀다.
나는 속으로
어설픈 약속 같은 주문을 하나 만들었다.
지금 같으면
조금 위험한 상상이었겠지만.
내가 내릴 역 전에 저 사람이 내리면
따라 내리자.
그게 아니면 인연이 아닌 것으로.
아마도
운명에 기대어 용기를 빌리려던
겁 많은 청춘의 계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철이
그 주문의 마지막이 될,
내가 내릴 역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일어섰다.
심장이 요동쳤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떨렸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아파트 단지 골목으로 접어들 무렵
나는 결국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시간 있으시면 커피 한잔..."
허술한 문장이었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 이상을 꺼낼 수 없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망설이듯 그녀가 멈췄다.
“지금은 늦어서 안 돼요.
전화번호 주시면 연락드릴게요.”
나는 들고 있던 오선지 한 장에
집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날
버스를 어떻게 타고 집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심장이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스물다섯 해가 흐른 지금
청춘의 떨림은 사라졌지만
대신
우연이 인연이 되고
서로의 청춘을 기억하며
서로의 세월을 함께 견딘 사람이 되었다.
그날의 한 걸음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삶은
거창한 결심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작은 떨림 하나가
달라진 시간이 되어 남을 수 있다.
우리 삶을 스쳐 지나간 선택은
얼마나 많았을까.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최고의 선택이란
가장 완벽한 답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답을
끝내
최선이 되도록 살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시작된 인연은
이제
수많은 계절을 건너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나는
그날의 나에게 말한다.
잘했다,
그냥 돌아서지 않아서.
그리고
지금 옆에 걷고 있는 당신에게도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
그날,
그 종이를
버리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삶이 흔들릴 때마다
결국 나를 다시 붙잡아 준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이렇게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연이 지나
우리가 되었고,
그 ‘우리’가
지금의 나를
여전히
살게 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