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Female to Equality
오마이뉴스 기재 글 참조.(수정 2018.11.09.)
우리나라의 주거에서 가장 큰 아이콘은 ‘여자’가 아닌 듯 싶다. 몇 년 전만해도 대부분의 아파트 광고는 유명 여자연예인의 전유물이었고, 현재도 ‘자이=이영애’, ‘푸르지오=김태희’, ‘힐스테이트=고소영’ 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 효과는 대단하다. 아파트광고의 ‘여성의 상품화’를 차치하고라도 한국의 주거문화와 여성의 관계를 살펴 보는 것은 우리주거문화의 단면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한국적 평등주의와 구별짓기를 통해 우리주거문화의 켜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전통적 부엌은 가사노동을 전담하던 여자에겐 고통의 공간이었다. 과거 여성은 일일이 (교자)상을 들고 남성의 공간이나 접대의 공간으로 음식서비스를 제공해야 했고, 대부분의 여성은 부엌의 불편한 시설을 자기의 본분인양 감내하고 참아야 하는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근대화에 따른 과거 도시 신흥주택이나 초기 아파트의 부엌은 전통적 부엌과 달리 서구의 입식 기거문화를 도입하였고, 이는 당시의 위생과 식생활 개선을 장려한 분위기와 맞물려 새로운 ‘문화주택(文化住宅)’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초기의 아파트에서도 여성의 가사공간으로 인식된 주방은 벽으로 분리되었고 주부의 노동도 가족들의 일상생활과 분리되었다.
1970-80년대 들어 아파트는 중산층의 대표적 주거공간으로 부각되었다. 맞벌이 부부의 증가, 여성노동에 대한 인식 변화,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 등으로 부엌은 점차 거실과 일체화 되면서 주방공간은 개방되고 편리한 부엌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었다. 지금은 일반화된 가전제품과 가공식품의 보급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경감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시스템키친이란 이름으로 부엌의 고급화를 지향하게 되었고 주방용 가전제품과 주방가구가 일체화되어 부엌(주방)의 면적도 크게 증가하였다. 가사노동을 하는 남성이 등장하고 미시족 여성, 캐리어우먼과 같은 다양한 여성상이 등장하면서, 가사노동은 주부의 일이 아닌 가족이 함께 하는 일로 변화하였다. 결국 부엌은 여성의 공간이라는 태생적 굴레를 벗어 ‘주방’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 의미도 제2의 거실, 가족들과 동등하게 호흡하는 가족의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압축적 근대화를 통한 ‘빨리 빨리’를 외쳐온 대한민국은 개인 및 세대별 고립화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고, 주방 또한 가족의 장소가 아닌 잠시 지나치거나 필요에 의해 이용되는 일시적 공간으로 전락하였다. 또한 프라이버시와 개인적 공간확보에 주력한 우리의 주거패턴은 가족이 모이는 공간을 박제화 하였고, 가족이 함께 모이는 시간도 개인적 삶의 패턴 변화와 각자의 바쁜 일상 때문에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가공식품의 발달과 외식의 증가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생활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불리는 브랜드 식당이 주방의 기능을 대체하면서 우리의 ‘패밀리(family, 가족)’를 만나기 위해선 집이 아닌 외부공간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일어나는 곳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우리의 주거공간이 확장되고, 주거의 질이 향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적 주거공간은 황폐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결국 주거의 ‘아우라(Aura)’는 밖으로 나가는 반면, 형식적 기능들만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한국적 상황은 우리의 주거문화의 궤를 같이 하는 ‘주거 자존감(identity) 부재’라는 심각한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건축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는 말이 있다. 그 중 ‘주거’는 그 시대 민초의 일상생활을 담는 바탕이 되는 장소(場所, place)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주거 공간에서 장소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 거 왜 일까? 그건 우리의 주거공간에 담겨진 인문사회적 모습의 변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유교적 질서와 통치에 따른 일관된 사회환경과 달리 현재는 자유와 평등, 선택 이라는 민주주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한국적 평등주의를 낳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었고, 이런 사회공학적 바탕에서 발전한 우리 주거공간은 평등지향적 주거공간을 강요받았다.
한국에서 평등(平等)이란 ‘기회’의 평등보다 ‘결과’의 평등에 주목한다. 너와 나 다 똑같으니 그 결과물도 동일해야한다는 논리다. 우리의 주거관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중산층의 등장과 더불어 주택의 대량공급은 획일적 평면을 우리주거문화에 공급하였고, 이는 균질적 주거공간을 낳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너와 나의 주택평면이 같다고 같은 집에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주거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주거공간은 성냥갑이라는 비아냥 거리는 소리에도 침묵해야만 했다.
보통 아파트를 ‘똑같은’ 형태의 반복이라고 비판하면서, 최근 나오는 대안은 경관이나 형태에 대한 얘기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일수도 있으나 실제 우리 주거문화의 획일성은 그 속에 담겨진 삶의 공간, 사람들의 주거패턴의 획일성에 기인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즉 형태나 공간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속에 담긴 삶의 흔적과 행태(行態) 문제라 할 수 있다.
사회문화적 민주주의의 확산 및 압축적 근대화, 생활양식의 변화 등은 우리나라의 평등적 개념을 ‘한국적 평등주의’라는 특수한 형태로 발전시켰고, 이는 우리의 주거공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앞서 언급한 부엌이외에도 안방은 평등의 공간으로 진화했고, 새로운 여성의 공간인 드레스룸, 파우더룸 등이 생겨나면서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여성전용공간이 상품화되기 시작하였다. 과거 극단적 평등주의는 주거공간에서 여성의 ‘새 옷’을 강조하였을 뿐 우리주거문화에 담긴 공간조직의 재구성과 삶의 질적 변화는 외면했다. 과거 절대적 기준을 강요하고 훈육했던 평등의 개념은 점차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상대적 주체로 변화하고 있고, 평등의 개념 또한 개인에 기반한 상대적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따른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사람과의 ‘차별’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이에 편승하여 많은 개발 주체는 ‘개인의 고립화’에 바탕을 둔 상대적 차별을 상품화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어, 평등의 사회문화적 의미가 어떻게 바뀔지는 그 경계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상품과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 대중문화는 이러한 문화가 실현되는 장(場)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언론, 교육, 정치 등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권력구조는 이러한 대중문화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소위 자본주의 권력자는 편승효과(재화 그 자체를 소비하는 것 보다 소비를 통하여 군중 내지는 특정한 세대 속에 합류하기를 갈망하는 현상)와 같은 소비 형태를 조장함으로써 특정 세대로의 편입을 대중들에게 강요하고 대중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개인의 문화적 소비에 대한 취향과 선호를 이루는 ‘성향’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어휘로 설명하였다. 각기 다른 사회의 계급이 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구별짓기(La Distinction)‘는 개인의 사회적 위치, 교육,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것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개인의 내면화된 사회구조는 현재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재산증식의 수단, 주거의 계층화, 상류층으로의 편입을 위한 쏠림현상 등 우리의 주거문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언론에 발표되는 우리의 주거는 단지 아파트 가격변화라는 지표화, 수치화된 정량적 비교대상으로 간주될 뿐 그 이면에 감추어진 민초의 삶과 공간(장소)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개인의 구별짓기를 강요할 뿐 아니라 우리의 주거문화를 경제중심의 주거패러다임으로 질식시키고 있다. 가격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균질화된 규율을 넘어서 각 개인의 주체가 반영된 정성적 주거문화공간을 찾으려는 노력은 정말 불가능할까? 스위트홈의 기원을 생각하니 문득 지금의 주거공간이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가계자산 중 부동산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69.8%(2017년 기준)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과거보다 부동산 비중이 조금 낮아졌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일본 43.3%, 미국 34.8%)와 비교했을 때 그 수치는 아직도 비정상적이다. 높은 부동산 쏠림현상은 가계의 살림을 주택에 고정시킴으로써 다른 문화적 활동이나 삶의 행복을 제약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삶의 다양한 즐거움을 일방향적인 단선적 삶으로 단순화하고 있다.
된장남과 된장녀로 대변되는 잘못된 성권력의 표상은 이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한국적 평등주의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민주주의 기회의 평등, 성평등과 상호 연동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이는 과거 주거를 바라봄에 있어 여자의 입김, 인구절반이나 차지하는 여자, 구매절대 세력으로서의 여자 등 성(sex)의 구별로 대변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이런 일련의 상황은 사회문화 자체가 남성에서 여성적 성향(gender)으로 변화한 게 아닌가 한다. 사회문화의 여성적 성향으로의 변화는 개인의 고립화라는 사회적 통제수단과 접목되면서 ‘주거를 통한 구별짓기’로 변질되고 있다.
감성소비경향이 강한 여성적 성향으로의 사회문화 변화는 겉으로는 주체적 평등과 바람직한 주거문화를 외치지만, 개인은 겉모습에 더 치중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되기를 원하는 심리적 허위의식를 바라는 ‘괴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가면의 착용은 우리사회를 감추는 허상임과 동시에 실제로 우리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의 주거는 주체적 평등의 상황에서 ‘구별짓기’를 하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도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려보면 슬픈 소리가 난다.”
- 나스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우리의 척박한 주거공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이 이 구절과 오버랩(overlap)되는 건 왜일까? 우리 자신은 항상 능동적 행위자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사회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 부르디외의 말처럼 대한민국에 울림이 있는 주거문화, 감동과 행복이 있는 주거 장소(housing place)가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