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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우 Mar 13. 2020

소소하고 확실한 횡령(화장품 훔치기)

트위터리안 지우

  회사에서 화장품을 훔치기 시작한 지 2년 2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훔친 화장품이 몇 개인지 세어보다 1,000개를 넘기고는 포기했다. 내 취미는 회사의 화장품을 훔쳐 트위터에서 나누는 것이다. 2년간 무료로 제품을 나누다 보니 "마케팅 팀이 운영하는 계정이다" 같은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자면 나는 화장품 회사의 SCM(Supply Chain Management) 팀에서 일하고 있다. 내 주된 업무는 재고 흐름을 파악하고 생산 일정을 스케줄링하며, 제품 생산을 핸들링하고 출고 운영 관련 프로세스를 잡는 것이다. 마케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다.




<합법적으로 제품 훔치기>

  제품을 훔치게 된 계기는 덕질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입사 직후 아이돌 그룹에 빠져버린 나는 대표님께 최애의 포토카드를 자랑할 정도로 엄청난 덕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루는 "많은 고객들에게 어떻게 우리의 제품을 알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퍼뜩 최애(최고 애정 하는 멤버)가 떠올랐다.(기승전 최애이던 시절)

  최애의 생일 때, 데뷔 기념일에, 1위를 했을 때, 트위터에서 기쁜 마음으로 여러 물건들을 나누던 트위터 친구들이 생각났다. 대표님께 제품을 협찬(?) 해주시면 트위터에서 이벤트를 열어보겠다고 시작했던 것이 2년이 흘렀다.




<취미생활 or 바이럴 마케팅>

  내가 트위터에 나누는 재고를 "훔친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내에서 나의 트위터 활동을 컨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지우" 계정은 오롯이 "지우"의 마음대로 움직인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나눔 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나눔 하고, 심심하면 나눔 한다. 주어진 한계는 제품 X개를 쓸 수 있다 정도이다. 


  시작은 인지 바이럴을 위해서였는데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되어버렸다. 사실 회사에서는 트위터 채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 마케팅을 하기에는 마니아층이 모여있는 곳이라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위터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SCM팀에서 일하고 있는 내가 "너무 재미있어하기 때문"이다. 



1. 중요한 채널은 아니지만 도전해보고 싶다면 지원해주겠다 

2. 재미를 느끼는 "일"이라면 응원해 주겠다



  좀 더 편하게 말하자면 "트위터? 지우 하고 싶은 거 다 해, 근데 그러다가 바이럴 되면 더 좋아" 같은 뉘앙스랄까.

  만약 트위터가 중요한 마케팅 채널이었다면 어땠을까? 유닛이 꾸려지고 상세하게 분석하고 기획한 내용을 토대로 스케줄에 맞추어 계정이 운영되었을 것이다. 혹은 내가 트위터를 재미없어했다면? 6개월 만에 계정이 멈춰 버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품을 계속 훔칠 수 있었던 것은 트위터에서 바이럴 마케팅을 주력으로 운영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구성원이 하고 싶은 일에 지원을 해주고 지켜봐 주는 회사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님과 면담 때마다 항상 받는 질문이 있다. 

  "일은 재미없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재미없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재미있는 일과 힘든 일을 말해주면 좋겠다." 

  "솔직히 일은 일이니까 한다. 재미없어도 괜찮다. 근데 트위터는 너무 재미있다. 내 취미생활이다"






<취미를 업무로 가장하기>

  물론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회사가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다. 트위터 계정 또한 어느 정도는 회사의 이점이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사실이다.(제품 후기를 깨알같이 사내 여담방에 공유하며 목숨 유지 중) 그래도 해보고 싶은 일을 마음껏 이야기해볼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소소한 결과물이라도 구성원이 행복을 느끼는 일이라면 지원해 줄 수 있는 부분은 확실히 우리 회사의 장점인 것 같다. 


  이제는 정말 계정주가 회사 자본 뿌리고 싶어서 운영하는 계정이 되어버렸지만(남의 돈 쓰기 진짜 재밌음), 오늘도 취미생활을 업무인 것처럼 한편에 트위터를 켜 놓는다. 소소하고 확실한 횡령으로 트위터에 나눌 재고를 확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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