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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Nov 09. 2020

2016년, 너는 강남이야, 강북이야?

뼛속까지 강남 아이인 강 팀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사실 며칠 동안은 그녀와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게 영 어색했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 일은 하고 있으나, 그와 다른 세상에 사는... '그녀'. 한편으론 사는 게 참 재밌구나 생각도 했다. 그런 특정계층을 마주칠 일은 평생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의 회사와 함께 꽤 오랜 시간을 일해온 디자인 회사의 송실장 님과 새로 론칭하는 게임 프로그램 관련 미팅을 끝낸 후, 식사를 하며 대학시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송실장 님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였는데, 전공 특성상 강남의 부유한 친구들이 학과에 많았다고 했다. 자신이 '강남'을 경험한 건, 대학교 1학년 신입생 OT(오리엔테이션)를 갔을 때였다고 했다. 그때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송실장 님은 어린 시절 아버지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했다. 강북의 성북동에서 성장한 그와 마찬가지로, 송실장 님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강남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신입생 OT에서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친구가 그녀를 보고 대뜸 물어본 첫마디, "너는 강남이야, 강북이야?". 처음 그녀는 이 질문이 무슨 뜻인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강남과 강북이라니? 난 인천 출신인데?


우선 강남과 강북이라는 지역적 구분은 매우 서울 중심적 발상이다. 서울의 인구는 겨우 대한민국 인구의 약 19%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성장기를 보낸, 서울이 고향인 거주자들은 마치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서울에 거주하는 듯한 - 인구의 80%가 거주하는 비서울권은 존재도 하지 않는 듯 행동할 뿐만 아니라, 비서울권 지역에 대한 관심도, 이해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송실장 님이 우물쭈물 답을 못하고 있자, 자신은 지금 분당에 살고 있지만 강남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성장했노라고 - 자신은 강남 출신이라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강남으로 표현하였다. 송실장 님이 인천 출신임을 알자마자 그녀는 이내 다른 강남 출신의 친구들에게로 옮겨 갔다.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어떻게 '강남' 일 수가 있는지...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의 주택이 어디에 위치하는 가가 곧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설명해주고 그것이 '힘'이며 '권력'임을 깨닫게 되면서 송실장 님은 신입생 OT에서 만난 같은 과 친구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고.


인천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문화적인 활동에 대한 갈망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틈만 나면 친구들과 서울의 대학로로 연극 구경을 다녔던 송실장 님은 오로지 인천이라는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서 대학교도, 직장도 그곳에서 가급적 먼 곳으로 구했다.


직업 특성상 야근이 많아 직장과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는 편인데, 처음 서울에 집을 구한 곳은 강남구 논현동이었다. 2000년대 중반 연립주택 옥탑방을 보증금 500만 원에 월 30만 원에 구했다. 자신이 그동안 사진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구한 집이었는데, 난방이 되지 않아 겨울을 지내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자신이 거주하던 연립주택에는 유흥업소에서 일하시는 여성분들이 많았는데, 어머니가 와서 보시고는 깜짝 놀라셔서 당장 방을 빼라고 하셨다. 그녀가 상상한 강남과는 거리가 멀었던 논현동 연립주택에서의 생활은 강남에 대한 오해와 환상을 깨버렸다. 한편으론 강남에도 여러 다양한 계층이 살아가는구나 깨닫게 해주었다고 했다.


강남구 논현동의 옥탑방에 너무 충격을 받으셨는지, 짠순이 어머니께서 선뜻 보증금을 지원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잠원동의 연립주택 원룸(15평 정도)을 보증금 3000만 원에 월 20만 원에 계약을 했다. 조용한 주거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잠원동의 집은 아침나절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따뜻한 집이었다. 처음으로 집다운 집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송실장 님이 대학에 들어 간 이후, 부모님께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시게 되었지만(아파트에 사는 것이 어머니 소원이셨다고) 학창 시절 내내 비좁은 다세대 주택에서 부모님과 오빠, 자신, 이렇게 네 식구가 사는 게 너무 답답했다고 했다. 자신을 악착같이 입시 준비와 취직 준비에 매달리게 한 건, 순전히 그 답답한 집 덕분이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송실장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 자신도 성북동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을 쳤었다.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외국인 기숙사에 빈 방이 있는 걸 알게 되어 운 좋게 2년 동안 거주할 수 있었다. 그때의 해방감이란! 왠지 모를 위로감 같은 게 생겼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그 시간을 자신만 보낸 것이 아니라는 위로감...  송실장 님도 강남에는, 더구나 아파트에는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강남이라면 무조건 싫다던 몇 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송실장 님은 강남에 아파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살고 싶지는 않지만, 강남에 아파트가 한 채라도 있으면 그걸 담보로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송실장 님은 서울의 미친 아파트 가격에 대한 뉴스를 대할 때마다, "우리 부모님은 강남은 고사하고 왜 서울에 아파트 한 채도 없는 걸까...." 중얼거리게 된다고 했다.


정부가 아무리 단속을 해도, 주택시장은 안정되기는커녕 지속적으로 오르기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오를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한 이승환 형님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의 노랫말처럼 이 예감은 아마 적중할 것이다. 그녀의 표현대로 강남의 아파트는 마치 '돈을 찍어내는 기계' 같았다. 이 사회가 만들어낸 강남이라는 이 허구적 세상은 송실장 님이나 그에게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한번 벌어져버린 강남과 비강남권 간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질 줄을 몰랐다. 장모님 말씀대로 2010년 빚을 내서라도 아파트를 샀어야 했나... 강북의 아파트 4채를 팔아야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겨우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송실장 님과 그녀의 약혼자도 처음엔 주택을 굳이 소유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만큼 자산적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고 했다. 강남의 똘똘한 아파트 한 채가 그녀의 모든 생활 - 나이 드신 부모님을 돌보는 일부터, 사업자금, 노후 생활 등-을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주택청약통장도 혹시 모를 주택마련의 기회를 잡기 위해 잘 모셔두고 있다고 했다.


"저는 부모님 세대랑은 다르게 살 줄 알았어요. 주택을 마련하려고 아등바등 사는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곳에서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차를 타고 다녀보면 서울에 아파트가 저렇게 많은데 내가 살 곳은,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는 게 정말 기운 빠지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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