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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메 Nov 24. 2016

실패를 배운 날

유학생활 첫 프레젠테이션 

22/11/2016

@Grenoble, France




눈 밑이 쾡하다. 3일 연속으로 3시간밖에 못 잤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래도 정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짝 깨어있었다. 유학 오고 나서 처음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날인데, 당연히 졸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개인작업이 아닌 그룹 발표이기에, 같은 조원들에게 폐를 끼치기도 싫었다. 


나 자신에게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그 어느 때보다 화장과 옷에 공을 들였다. 마치 사귄 지 1개월밖에 안된 남자 친구와 설레는 데이트를 앞둔 어느 아침의 모습처럼. 물론 바짝 화장을 하고 옷도 차려입는다고 그게 프레젠 발표를 직접적으로 성공시켜주는 건 아니지만, 내게는 일종의 주문 같은 거였다. 




그렇게 나갈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조원들과의 최종 미팅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아있었지만, 어제 겨우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다 만들었던 나는 아직 발표원고를 완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만나기 전에 원고를 만들기 위해 먼저 도서관에서 작업을 했다. 이번 프레젠은 영어로 하는 거인데, 독일에서 온 베라 그리고 미국에서 온 니콜라스와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나의 영어실력이 턱없이 부족한 바람에 늘 내가 둘의 뒤를 겨우 따라가듯이 토론을 하고 발표 준비를 했었다. 둘은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해주긴 하지만, 내가 괜찮지가 않았다. 항상 미안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발표할 때만큼은 버벅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고 싶었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데까지 간단하게 원고를 완성하고 둘을 만나러 학교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렇게 카페에서 다 같이 마지막으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확인하고, 통연습을 해보고 함께 다시 학교로 향했다. 






15시 15분 딱 맞춰서 들어간 교실에는 이미 교수님과 몇몇 학생들이 와있었다. 평소와 별다른 것 없이 먼저 우리는 자리에 앉아 짐을 놓았다. 오늘도 교수님은 유쾌한 유머로 수업의 시작을 알렸다. 몇몇 학생들이 그런 교수님의 말씀에 받아치고, 그렇게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수업의 풍경이었다. 평소와 다른 거라곤 내 심장의 요동 소리뿐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버벅거리면 어떡하지, 잘할 수 있을 거야, 불안감과 자신감이 교차하며 내 심장 속을 휘어 저었다. 사실 원고도 제대로 다 못 외운 상태긴 했지만, 일단 파워포인트와 내 임기응변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출석체크가 끝나고, 프레스리뷰와 잠깐의 토론이 오간 후, 우리의 발표시간이 다가왔다. 발표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는 사이, 머리 속이 새하애져버릴 것만 같은 걸 애써 붙들며 니콜라스와 베라와 함께 파이팅의 포즈를 취했다. 이 둘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니콜라스가 시작해, 순조로이 설명한 후, 바통은 내게 넘겨졌다. 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떼었다. 주제를 설명하고, 분석 포인트를 설명해갔다. 한마디 한마디 마칠 때마다 교수님의 표정을 살펴봤다. 



그 순간 느꼈다. 





망했다.





교수님은 나의 말이 별로 납득이 안 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다 보니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말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지금 내가 설명하고 있는 게 너무 유치하고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이고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내용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말을 몇 번이나 버벅거렸다. 중간에 교수님이 '힘들면 프랑스어로 해도 돼'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던져주시기도 했지만, 그 말은 마치 '프랑스어로 해서라도 날 좀 납득시켜봐'처럼 들렸다.


그렇게, 나의 변변치 않은 슬라이드와 내 발표에 집중하고 귀 기울여준 친구들과 교수님의 뜨거운 시선 속에서 겨우 내 발표를 마쳤다. 그다음에 베라가 심폐소생술을 하듯 우리 발표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그제야 교수님도 표정이 누그러지셨다. 


그렇게 우리의 발표는 끝났다. 

솔직히, 발표 마침과 동시에 난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교수님의 평가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내 부분을 지적하며 '솔직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전혀 모르겠다. 이게 왜 이 주제랑 관련이 있는지도 이해 못하겠고, 네가 한 말도 이해가 잘 안됐다.' 라며 차가운 시선과 함께 한마디 코멘트를 남겼다. 그의 한마디를 들은 후 나는 그래도 태연한 척 납득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전혀 태연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창피함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발표주제에 대한 토론이 학생들과 교수님 사이에서 오가는 사이 우리는 계속 앞에 서있어야 했는데, 난 애꿎은 원고 종이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억울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도서실에서 책도 빌리고 몇 번 씩이나 밤을 새우며 보낸 이 일주일간의 노력은 대체 뭐였을까. 뭘 하자고 그렇게 그래프와 자료를 찾으러 EU사이트를 수십 번이나 뒤졌을까. 내 노력이 한마디만으로 한순간에 무시당하고 부정당한 느낌. 최근 몇 년간 느낀 수치심 중 최고급이었다.


그런 반면 후회도 물밀려 오듯이 들었다. 좀 더 오랜 시간 공들여서 조사해올 걸, 좀 더 참고서적 읽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 올 걸, 아니 애초에 영어를 좀 더 잘할 걸, 유학 오기 전에 공부 더 해올걸, 갖가지 후회들이 들었다. 지난 일을 곱씹어 후회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생각해오던 나지만, 이 날만큼은 그런 후회들을 받아쳐낼 용기가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리고 반성하고, 인정했다.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거라고. 그리고 분석 방향도 잘못 잡았다고. 애초에 이 주제를 대하는 나의 사고방식이 달랐던 거였다. 그렇게 내 마음속 분쟁이 한바탕 정리가 될 무렵,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은 다들 짐을 챙기고 하나 둘 교실을 빠져나가고, 교수님도 노트북을 챙기고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니콜라스는 우리에게 Good Job이라 한마디 말하고, 우리 둘도 웃으며 수고했다고 서로를 다독였다. 내 자리로 돌아가 내 물건들을 챙기며 정리를 하는 사이, 베라가 내게 와서 조심스레 괜찮냐고 물어봐왔다. 나는 애써 웃으며 '뭐가?'라며 모른 척하며 되물어봤다. 사실은 그녀가 물어보는 의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까 교수님의 말에 상처받지 않았나 해서 걱정돼서 물어봐왔다고 한다. 사실은 아직도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애써 그런 티를 보이지 않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 옆에 있던 프란체스카가 내게 '네 발표 나쁘지 않았어, 자료도 알기 쉬웠고. 선생님이 왜 저렇게까지 얘기하는지 모르겠어.'라며 나를 다독여줬다. 예의상 얘기해주는 거일지라도 그저 난 그런 한마디에 위로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는 당장 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존심이 바닥을 꽂고 있었지만, 그녀들 덕분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정말 고마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전까지는 프레젠테이션으로 실패한 적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나름 발표 수행평가 만점을 받는 일이 많았고, 대학교 들어오고 나서도 무난하게 발표과제를 클리어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이 날 교수님의 한마디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깊게 내 가슴에 비수를 크게 꽂았다.


 그래도, 그만큼 실패라는 것을 배우기도 했다. 나의 노력을 완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어려움도 배웠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얕은 지식으로 공부를 해왔던 건지를 새삼 깨닫기도 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발표 자체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발표의 수확은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아직 비수 꽂힌 가슴 구멍은 여전히 크게 남아있지만 말이다. 

다른 수업에서 프랑스어로 하는 발표를 다음 12월 중순에 앞두고 있는데, 오늘의 실패를 발판 삼아 오늘 같은 실패는 다시는 하지 않도록 더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






결국, 공들인 화장과 예쁘게 차려입은 옷차림은 내 발표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곳에서 쓸데없이 효력을 발휘했다. 



소소한 자랑을 하나 해보자면, 내 생에 처음으로 번호를 받았다. 먼저 말 걸어와 페이스북 있는지 물어보는 경우는 몇 번 봐왔지만, 아예 처음부터 번호를 건네주는 사람은 처음 봤다.


발표가 끝나고 그다음 수업도 끝난 후 난 식재료를 사기 위해 슈퍼로 향했다. 이대로 집 가서 아침에 그렇게 정성 들인 화장을 지워버리기도 아까워서, 라는 이유도 있었다. 장바구니를 가져오지 않은 바람에 많이 사지는 않고 몇 가지 재료만 고르고 재빠르게 계산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내 앞에 걸어가던 어느 중년 남성이 몇 번 뒤돌아 나를 슬쩍 보더니 멈춰 서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건 또 뭔가 싶었다. 처음에는 혹여 사기나 그런 안 좋은 길로 인도하려는 전략 중 하나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물어봐오는 사람은 몇몇 있었고, 그중에는 후에 좋은 친구가 되어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기에 대놓고 뿌리치진 않고 일단 나도 멈춰 서서 한국이라고 답했다. 

그러더니 학생이냐고, 여기서 공부하냐고, 무슨 전공이냐고, 이 3가지를 물어보고 내가 답했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그렇구나, 그래요 잘 가요' 이러면서 자기 차가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또 이건 뭔가, 싶었지만 내가 대답한 요소 중에 그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게 있었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나도 트램 정거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트램 정거장에서 카드를 찍은 후 트램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아까 그 남자분이 다시 내게 온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날 보며 그는 '당신만 괜찮다면 연락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예쁘고 아름다워서 더 알고 지냈으면 해요.'라며 그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내게 내밀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했고 거절 방법을 모르기도 했어서 일단 그 쪽지를 받긴 받았다. 그러자 그는 '그럼 잘 가요' 이러면서 다시 슈퍼 주차장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사귄 지 1개월 남짓한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날처럼 화장을 했더니 이런 재미있는 경험도 해봤다. 오늘 아침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었던가. 그래도 그의 쪽지는 죄송합니다, 라는 한마디와 함께 쓰레기봉투 속으로 고이 모셔 보냈다. 스타일리시한 꽃중년 남성분이셨지만, 지금 당장은 남자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고달픈 하루를 소소한 재밌는 에피소드 획득이라는 작은 기쁨과 함께 마칠 수 있었다. 


다음 발표 때는 1년 사귄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날의 화장으로 준비를 해야겠다.




Su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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