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 soir, avec les RACLETTES
05/11/2016
@Grenoble, France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 회색으로 덮인 하늘. 촉촉하다 못해 축축한 안개로 뒤덮인 산.
모처럼 즐거운 주말의 시작인 토요일 아침, 나는 커튼을 열고 한참 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문을 닫았다.
'저녁 약속까지는 얌전히 집에 있어야겠다'
날씨만 보면 정말 나가기 싫은 날이었다. 하루 종일 방에 콕 박혀 이불속에서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 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날씨.
게다가 비까지 내린다. 쉬지 않고. 세지면 세졌지 약해질 기미 따윈 전혀 안보였다.
며칠 전 핼러윈 파티에서 우산을 잃어버린 바람에 이따가 우산 없이 트램 정거장까지 뛰어가야 할 생각에 괜히 우울해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책 보며 웹툰 보며 유튜브 보며 시간을 때우다가 오후 4시쯤 돼서야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2주 전부터 잡은 약속인데, 어쨌든 이 빗속을 뚫고 가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지금까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하끌렛(라클렛)을 모처럼 먹을 수 있는 기횐데.
마음을 다 잡고 본격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오후 6시 반.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다 됐다. 화장도 열심히 했는데 비를 맞아야 하니 참으로 우울해질 따름이었지만, 5분만 뛰면 될 일 아닌가.
일단, 뛰었다.

그리고 트램 정거장에 도착했을 땐, 보기 좋게 머리와 코트가 젖어있었다.
친구가 날 보자마자 우산 안 가져왔냐며, 측은하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그래도.. 화장한 얼굴은 사수했다. 그거면 됐다.
그렇게 친구와 함께 트램을 탔다.
오늘 하루 종일 보이지도 않던 태양이지만, 그래도 해가 지고 안 지고는 그 밝기가 천지차이였다. 이미 해가 저문 지 한참 된 저녁 6시 50분경은, 밖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둡고 축축했다.
그렇게 벌벌 떨며 약속 장소인 Gières-Gare 정거장에 도착했다
정거장에 내리니, 노란 우산을 든 나 언니(가명)가 보였다.

언니를 보니 어찌나 반가운지.
나 언니는 그르노블에서 내가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고 있는 한국인이다.
오늘은 언니네 집에서 언니 남자 친구와 나와 내 친구와 함께 넷이서 라클렛을 해 먹는 날이다.
RACLETTE
라클렛, 여기 발음으로는 하클렛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퐁듀와 더불어 스위스를 대표하는 치즈 음식이라고 뜨기는 하는데, 스위스라기보다는 스위스와 그 주변 프랑스 지방, 특히 사보와 지방에서 발달한 치즈 음식이다. 원래는 치즈 덩어리 단면을 직접 녹여서 빵이나 삶은 감자에 붓는 식으로 먹는 요리지만, 요즘은 콤팩트화 된 시대다 보니, 덩어리 대신 사각형으로 잘린 치즈 조각들을 전용 플레이트를 써서 녹여서 먹는 방식으로 보편화되어있다.
프랑스, 스위스에서는 겨울에 다들 즐겨 먹는 가정요리라고 한다.
언니 따라 언니 남친도 타고 타고 있는 차를 타고 꼬불꼬불 산을 올라갔다. 내가 멀미 안 하는 체질이라 다행이지, 차멀미 금방 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온전히 갈 수가 없는 길이었다.
암튼 그렇게 안갯속을 지난 지 15분.
드디어 언니네 집에 도착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안내된 다이닝룸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니와 언니남친이 갖가지 술을 꺼내 준비한 후, 우리의 식사는 시작되었다.
먼저 아페리티프로 대접받은 건, 모나코.
석류 시럽(시럽인지 주스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레모네이드, 맥주(언니네는 1664를 썼다)를 섞은 일종의 칵테일이라고 하는데, 언니와 언니남친이 만들어줘서 처음으로 마셔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정말 맛있었다. 또 한잔 부탁하고 싶은 걸 꾹 참았을 정도니.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라클렛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으로도 보이는 철판을 써서 먹는다. 저 철판을 써서 치즈도 녹이고 부재료도 훈제할 수도 있다. 언니네 같은 경우는 파인애플과 버섯이 부재료로 준비되어있었다.
아, 미리 말해두자면, 파인애플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방법을 설명하자면, 한 사람당 두 소 플레이트씩 써서 하나는 치즈용, 또 하나는 그 이외 재료용으로 쓴다. 그렇게 플레이트에 재료를 담아 철판 아래에 쏙~ 넣어서 치즈는 표면이 부풀어오를 때까지, 부재료들은 연기가 술술 모락모락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서 뺀 후 갖삶아놓은 감자나 빵, 갖가지 햄들에 쑤~욱 부어서 먹으면 된다.
기계만 있다면, 사실 정말 쉬운 요리인 거 같다. 설명 한 번만 듣고 바로 각자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그래서 겨울철 대표 가정요리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이게 얼마나 대표적인 집요리인가를 알 수 있냐면, 요 시기에 우리 기숙사 근처 대형슈퍼에 가서 치즈 코너에 가면 제일 앞에 크게 프로모션 상품으로 나와 있는 게 라끌렛용 치즈 세트다.
갓 녹인 치즈를 갖삶아 으깬 감자 위에 슈루룩 부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거기에 파인애플의 톡톡 튀는 식감과 맛을 곁들이니, 절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한 조각 두 조각 녹여 감자와 빵 위에 부어서 뜨겁고 쫀득한 식감을 계속 즐기다 보니, 오늘 아침 커튼을 쳤을 때 엄습해왔었던 우울함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치즈의 무게감은 추운 날씨도 눌러버릴 만큼 웅장하고 경쾌했다.
음료로는 샴페인을 마셨는데, 이것 또한 치즈와 찰떡궁합이었다.
치즈가 쫀득하다 보니, 톡 쏘는 목 넘김도 필요해지는데, 그 역할을 해주는 게 샴페인이었다. 아무래도 파인애플 조각들로는 한계가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던지.
다들 샴페인도 어느 정도 들어가고, 분위기도 훈훈해져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와인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오늘 간 언니네 집은 정확히 말하자면 언니네 프랑스인 남자친구네 집인데, 지하에 와인 창고가 있다고 한다. 프랑스 주택에서는 그런 창고가 있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놀랐는데, 더 놀라웠던 건 그 남친분의 증조할아버지가 담그신 1982년 산 알코올 농도 60%짜리 와인이 있는데 마셔볼래?라는 언니와 남친분의 제안이었다.
알코올 60%라니.. 세상에 그런 숫자도 존재하는구나,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숫자가 불러오는 호기심이란.. 둘의 제안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즉석 와인 시음회.
언니가 어디선가 꺼내온 소주잔에 0.5센티도 안될 정도의 양의 와인을 남친분이 부어서 내게 건넸다.
먼저 냄새를 맡아보자니, 오랜 시간 창고에서 보존된 그런 향이 강력한 시큼함과 함께 내 후각을 공격해왔다.
얼마나 센지는 이미 냄새만으로 지각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시음회인데. 꿀꺽.
말로 표현해보자면, 강력한 하얀빛이 촤악 눈앞에 들이닥치는 그런 짜릿한 목 넘김이었다.
60%의 34살 된 화이트 와인님은, 나이에 비해 굉장히 화끈한 분이었다.
그다음으로 권유받은 건, CHARTREUSE라는 와인같이 생긴 약주였다.
샤뚜즈라는 산에 있는 수도원에서 만들어지는 술인데, 이건 이 지방에서밖에 안 파는 술이라 선물용으로도 굉장히 좋다고 한다. 근처 슈퍼에서도 다른 와인들에 비해 싸게 판다고 한다.
이것도 55%라는 아까 그 화끈한 할아버지 와인님과 견줄 정도로 강한 알코올 농도를 자랑한다.
하지만 맛은 훨씬 더 부드럽고 달았다.
나이가 더 어려서 그런가. 섹시함과 박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풋풋함과 달달함이 가득한 그런 맛이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와인들을 소개해주었다.
리옹을 거쳐 더 위로 올라가 디종이나 브장송으로 가면 시기 따라 와인투어도 하니 관심 있으면 찾아보라는 감사한 정보를 또 하나 얻은 즐거운 시음회였다.
그렇게 메인을 끝낸 후, 프랑스 요리답게 후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식으로 언니가 꺼낸 건, 네스프레소의 아메리카노와, 누가(Nougat)였다.
NOUGAT
프랑스 스타일 엿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견과류가 든 설탕 덩어리. 아랍풍 과자로, 8세기 아랍인들이 프랑스 중부에 왔을 때 전해진 과자라는 설명이 위키피디아에 올라와있다. 단독으로 먹기에는 너무 달아서 무조건 커피와 함께 먹기를 추천한다. 한국 욕 엿 먹으라는 말을 하기가 껄끄러울 때 누가 먹으라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것만 같은 하이 개그를 치면 그래도 누군가는 웃어주겠지.
커피 저 너머로 보이는 게 누가다.
원래는 덩어리로 돼있었지만 언니 남친과 언니가 우리를 위해 식칼로 열심히 잘라준 덕분에 굉장히 먹기 편한 사이즈로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치즈의 느끼함을 잊게 해줄 만큼 쌉싸름한 맛있는 아메리카노도 함께.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우리는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언니네 차 안에서 창 너머로 바라본 바깥 풍경은 여전히 얼어붙을 만큼 춥고, 축축하고, 회색이 쌓이고 쌓여서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만큼은 녹아내린 라클렛만큼 뜨거워져 있었고, 34살 와인님만큼 화끈해져 있었고, 누가 엿을 날려도 누가?라는 재미없는 개그를 날려도 웃을 수 있을 만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는 건, 참 행복한 거 같다.
프랑스 사람들이 식사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아무리 우울해져 있어도 식사한 시간만큼 행복도 쌓이니까.
식사할 때 나오는 요리의 맛은, 그 날 모두가 느낄 행복감의 맛이기도 하다.
마치 내가 오늘 느낀 행복감은 녹아내린 따뜻한 치즈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또 언젠가, 이 추운 겨울을 달랠 만큼 행복한 식사를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
Sung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