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끝자락을 잡으며 맞이한
3연휴

연휴의 시작, 일본 드라마를 찾게 되는 마지막 가을

by 나리메

10/11/2016

@Grenoble, France





오후 4시 20분.

수업이 끝나고 나서 다들 자기 짐을 챙기고 부산 떨며 나가는 사이, 나는 뭉치기 직전인 어깨를 펴기 위해 기지개를 한번 피고 난 후 천천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하지만 내게는 오늘 저녁부터 연휴의 시작이다.




11/11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빼빼로데이로 통하는 11월 11일은 프랑스에서는 역사적 사건에 기반해 책정된 휴일 중 하나다. 바로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의 종전(이라는 이름의 휴전)을 기리는 날이다. 프랑스어 표기로는 Armistice de 1918이라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휴일은 그저 학교 수업 없는 휴일일 뿐.

학교 친구들이 수업 끝나자마자 오늘 어디서 술 마실지, 몇 시에 누가 클럽 갈지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 고 있는 것만 봐도 학생이 생각하는 휴일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유럽이라고 다를 거 없었다. 우리 모두 다 같은 생각을 가진 인간이구나,라고 새삼 느껴지기도 했다.





IMG_8047.JPG 그르노블은 어제, 오늘 계속 춥다. 가을도 이렇게 끝나는가보다.


평소의 나라면 오늘 같은 날이니 술 마시러도 가고 2차로 클럽도 갔겠지만, 오늘은 뭔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비가 와서 그런가. 낙엽들과 함께 또 하나의 계절이 끝나가는 게 못내 아쉬워서 그런가.... 이렇게 감상에 젖어보기도 하지만, 결론은 그냥 춥고 돈 없고 나가기 귀찮아서 기분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축축 내리는 빗 속을 지나 트램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온 건 5시. 해는 이미 반이나 저물어갔다. 나는 바로 잠옷으로 갈아입고 노트북을 켰다. 술과 클럽을 마다한 거는 단지 귀찮아서였지만, 그래도 뒤늦게나마 가을을 타고 있었나 보다. 내 손이 자연스레 일본 드라마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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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기분이 울적해질 때마다 일본 드라마를 찾아본 게. 일본에 살았으니까 평소에도 일본 드라마를 볼 수 있지 않느냐는 핀잔도 가끔 듣곤 했지만, 한국에서도 난 원래 드라마를 잘 챙겨보는 편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더더욱 드라마를 볼 일이 없었다. 완결이 나지 않은 드라마는 쳐다보지도 않은 것도 한몫했다. 어두운 내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건 바로 일드 정주행이었으니까.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가 일본 드라마를 찾게 되는 절정의 시기는 항상 11월이었다. 마치 만성 저주에 걸린 것처럼 나는 늘 11월에 슬럼프를 겪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울적해지는 시기가 오는데, 그럴 때마다 날 진정시켜준 게 일본 드라마였다. 특히 90년대 특유의 글루미한 분위기가 녹아내린 드라마나, 00년대의 드라마들은 장르 상관없이 날 아주 들었다 놨다 하며 내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이제는 고등학생 때만큼 심한 슬럼프가 찾아오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여전히 11월만 되면 나는 일본 드라마를 찾게 된다. 마치 가을을 타는 것처럼. 어쩌면 내게는 일본 드라마를 찾게 되는 게 가을을 탄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일본에서는 츠타야에서 돈 주고 빌려서 보곤 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렌털 체인점은 없으니 그리 합법적이지는 않은 방법으로 찾아봤다. 예전부터 보고 싶은 드라마는 몇 개 있었지만 막상 찾아보려니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일단 닥치는 대로 제목을 검색해보고, 볼 수 있는 상태의 영상이 있는지를 찾아봤다.



그렇게 찾아 찾아 결정 난 나의 올해의 일드.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 きょうは会社休みます。>

きょうは会社休みます.jpg

'오늘'이란 단어를 일부러 한자(今日)가 아닌 히라가나(きょう)로 표기를 해놓은 게 예전부터 인상 깊게 남았던 드라마였다. 저 한마디 속 '오늘'에는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괜스레 궁금해지는 문구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었던 타마키 히로시가 나오는 드라마라 본 방송할 때 꼭 챙겨보고 싶었던 드라마였었지만, 그 당시에는 평소 드라마를 안 챙겨보던 습관이 고쳐지질 않아 결국 마지막 화까지 본방송으로 볼 일은 아쉽게도 없었던 드라마 중 하나다. 그 후로 언젠가는 보고 싶다, 라는 아쉬움과 함께 내 머릿속에서 잊힐 뻔했지만, 다행히 잊히진 않았다. 이렇게 이번 연휴의 나를 달랠 드라마로 채택되었으니.


맛보기로 1화를 보고 왔다. 역시나 현실에서는 없을 법한 인물 구성이고 전개였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늦가을을 타고 있는 내 마음을 밝게 비춰주었다. (일본 드라마는 항상 비현실성과 현실주의의 딜레마 속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난 일본 드라마가 좋다.)

주인공 하나에가 갑작스레 하루를 쉬듯, 늦가을도 갑작스레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드라마를 다 보고 이 늦가을도 털어내고 진짜 겨울을 준비해야지.





여기 그르노블, 낙엽들은 우수수 떨어지고 눈이 뒤섞인 비가 내리며 기온도 한자릿수를 기록해 곧 있으면 영하까지도 내려갈 기세로 겨울이라는 냉정한 녀석이 가을을 내쫓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 끝자락에 서서 가을을 붙잡고 있다. 하나에와 함께, 천천히 올해의 늦가을도 보내줘야겠다. 겨울아, 서두르지 말아주렴.






Su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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