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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메 Dec 02. 2016

그 겨울, 밤바다

그 겨울, 네덜란드 #2  스헤베닝언 북해에서 보낸 아침과 밤


일시:27 Nov. 2016

@Scheveningen Beach, The Hague, Netherlands


*사진을 클릭하시거나 터치하시면 확대됩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틀 째 아침을 맞이했다.

조식을 먹으러 지하 리셉션으로 향했더니, 치즈, 빵, 햄, 잼 , 계란 프라이, 스크램블 에그 등등 뷔페식으로 푸짐하게 나열된 음식들이 날 맞이했다. 생각지도 못한 진수성찬에 침을 꿀꺽 삼키며 이것저것 집어 들었다. 경비를 최대한 아껴야 했기에, 최대한 배부르게 많이 먹었다.



가급적 점심을 거를 수 있을 만큼 먹어두고, 리셉션에 계셨던 주인아저씨에게 덩큔벙이라 한마디 하고 내 방으로 올라가 짐을 챙겼다. 부츠를 신고 현관문을 열자, 살짝 구름이 낀 흐린 하늘이 날 맞이했다.




자전거가 인상적인 한장.

하지만 비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흐린 날씨도 아니고, 조금만 기다리면 바람을 타고 지나갈 그런 구름들처럼 보였다. 난 별 걱정 없이 유유히 바닷가로 향했다.


생선을 먹는 동상


헤이그에 와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 스헤베닝언 해변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 모래사장 바로 앞까지 오더니, 커다란 동상 3개가 날 맞이했다. 절망하는 동상, 생선을 먹는 동상, 자는 동상이 있었지만, 제일 바다와 어울리는 생선을 먹는 동상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동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난 다시 뒤를 돌아서 바다로 향했다. 생각보다 모래사장이 컸다. 파도치는 곳까지 가기 위해 부츠 굽이 푹푹 모래 속에 빠지면서도 꿋꿋이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바다와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날만을 기다려왔던 터라, 힘들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오히려 가다가다 뒤돌아봤을 때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을 보면 흐뭇해지기까지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바다와 가까워지고 나서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았다고 해봤자 그냥 가방 놔두고 털썩 앉은 게 다였지만, 잠깐 바다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들기도 하다가, 다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저 바다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이걸 몇 번 반복한 후, 난 다시 털썩 앉아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고, 수평선 너머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모래사장이 하도 넓다 보니 원근감이 사라진다

사실 네덜란드 여행 계획 시점에서 헤이그를 제1 목적지로 정한 건, 바다가 있어서, 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소리를 좋아하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뱃소리도 좋아하고, 특히 바다 끝 저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수평선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면, 그 너머로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꼭꼭 숨겨놓은 채 태평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숨은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괜히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 모든 걸 포함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마냥 좋았다.


어린 시절을 바다 근처에서 자라기도 했고, 그 이후로도 거의 매년 계절에 상관없이 꼭 한 번씩은 늘 바다로 향했던 나이기에, 산에 둘러싸인 마을에 살고 있는 지금 괜히 더 바다가 그리웠던 걸지도 모른다. 바다는 언제 봐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특히 파도소리의 향수가 내 오감각을 자극하는 건 겨울 바다였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겨울의 파도는, 그래도 한 발짝 물러서서 저만치서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그도 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곤 한다. 그 찰나에 오고 가는 바다와의 교감이 난 좋다.


그리고 남해나 지중해 같은 수온이 높고 뜨거운 햇살과 잘 어울리는 그런 바다가 아닌, 지금 내가 있는 스헤베닝언과 같은 북해처럼 차갑고 거칠고 투박한 바다가 그런 교감이 더 잘 된다.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따뜻한 바다들(예를 들면 니스라던가 니스라던가 니스라던가..)은 너무 자연스레 사람을 맞이하고 대하는 게 마치 여심을 홀리는 카사노바의 그것처럼 보여 내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반대의 성격인 위쪽 바다들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그 모습이 오히려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나마 스헤베닝언도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북적이는 인기 있는 유럽 해변 중 하나라서 다른 나라 북해보다는 사람들의 손길에 익숙한 그런 바다였지만, 겨울의 북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육지를 향해 작은 포효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수평선이 아닌 지구의 둥그런 테두리같은 곡선처럼 보인다.




그래도 스헤베닝언에 사는 주민들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이 참 많은 거 같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춥고 흐린 날씨인데도 강아지와 함께, 아이와 함께, 손주와 함께 산책하러 나오거나 건강을 위해 조깅이나 사이클링을 하러 꽤 많은 사람들이 스헤베닝언 해변으로 나와있었다. 바다도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며 약한 파도를 치며 강아지들과 놀기도 하고, 어린아이를 물속에 못 들어오게 가끔은 빠른 속도의 파도로 아이를 밀어내기도 하며,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놀고 있었다. 역시 이 곳 바다도 사람과 마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바다도 좋았지만, 난 좀 더 바다와 단 둘이서 진솔한 교감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밤에 다시 이 곳에 찾아왔다.



왼 쪽 건물이 카지노, 오른 쪽 맥도날드가 있는 건물이 영화관이다.

밤의 스헤베닝언은 이제야 때가 됐다는 듯이 밝게 빛나 있었다. 그도 그럴게 뮤지컬 극장, 카지노, 백화점, 영화관에 아이스링크장까지, 온갖 오락시설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특히 밤 11시에 카지노 옆을 지나며 슬며시 창문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리셉션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입구 앞까지 계속되어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비수기인 겨울에도 이 정도면 여름에는 과연 얼마나 사람들로 미어터질까,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렇게 카지노를 지나 아침에 내려왔던 계단으로 내려와 보니, 아침에는 아직 오픈하지 않았던 레스토랑들이 이번에는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간판 조명이 빛나는 게, 그 느낌은 전혀 다르지만 마치 동해 바다 앞에 줄지어 선 횟집들의 조명들을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조명이 이렇게 밝은 것도 레스토랑이 있는 곳까지. 모래사장부터는 아무 조명 없이 육지의  빛에 의지하며 바다로 향해야 했다. 바다 저 너머 수평선 위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크루즈와 배는 잘 보였지만, 정작 내가 보고 싶었던 바다와 파도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뒤섞인 파도 소리만이 날 맞이했다. 그래도 난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로 향하기로 했다. 육지의 빛에 의지를 하면서도 바다를 볼 수 있는 그 위치까지, 다시 난 부츠가 퍽퍽 모래 속에 빠지면서도 꿋꿋이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아무리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북해일지라도, 밤이 되어서까지 그 애정을 표현하러 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레스토랑 주변에는 간간히 사람이 지나갔지만, 모래사장으로 발을 들인 순간 그곳은 나와 바다만이 온 세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바다 가까이로 가버리면 겨우 의지하고 있던 희미한 빛마저 잃어버려 황천길로 들어설까 봐 더 이상 가지는 못하고, 중간 지점에 멈춰 서서 가방을 툭 던져놓고 아예 모래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영하로 내려가기 직전의 공기에 방치된 모래 위에서 눕는 것만큼 등골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또 언제 해볼까. 그렇게 나는 벌벌 떨며, 손에 입김을 후- 불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누가 알았을까. 그날 밤, 사진으로는 못 담을 잊지 못할 추억을 갖게 될 줄을.





스베헤닝언의 밤바다는 자연 플라네타리움 그 자체였다.


추위가 살 속에 스며들어가듯이 추웠지만, 밤바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을 바라보니 그런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게다가 북해라 그런지, 별들이 엄청 컸다. 아니, 가까웠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두 눈으로는 채 못 담아내도록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이 하늘 아래 나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위에 커다란 카시오페아가 날 지켜보는 듯한 이 기분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아는 별자리 하나하나 찾아가며 모래 위에 드러눕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그러다가 그 순간, 그동안 날 힘들고 지치게 만들었던, 그래서 아직도 떨쳐내지 못하고 질질 끌고 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 프레젠테이션 제대로 망친 날이라던지, 내게 이런저런 상처 주더니 결국엔 연락이 없어진 썸남이라던지, 유학 와서 매일처럼 느끼는 열등감이라던지. 처음에는 그런 일들이 떠오르더니, 점점 과거에 있던 일들까지 물 밀려오듯이 생각이 났다. 마치 때때로 파도가 빠른 속도로 모래를 뒤덮으며 넘쳐 오듯이.


왜 그 상황에서 그런 힘든 기억들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울적해진 기분을 달래려고 아이폰 뮤직 플레이어를 틀었다.


내 아이폰은 나를 참 잘 알고 있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그 순간만큼 내 기분을 헤아린 날이 또 있을까. 랜덤으로 틀어서 제일 먼저 나온 곡이 하필이면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였다.

센스가 있다고 해야 하는지 괜한 오지랖이라고 해야 되는지, 당황한 내 손가락은 다음 곡으로 넘길까 잠시 고민했다가, 잔잔한 기타 소리가 생각보다 북해의 밤바다와 밤하늘과 어울려 그냥 아이폰이 틀고 싶은 대로 두기로 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이어폰을 빼고 조금 볼륨을 올려 틀었더니, 안 그래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장범준의 목소리가 파도소리와 어울리며 내 귀에 들어왔다. 여기는 여수도 아니고, 전화를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물을 사람도, 지금 당장 이 바다를 함께 걷고 싶은 사람도, 이 바다를 함께 보고 싶은 사람도 딱히 생각이 안 났지만, 장범준의 목소리와 선율은 바닷소리와 함께 내 마음을 달래주듯 내 마음속을 쿡쿡 찔렀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바다를 보고 있자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바다 대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히 눈물이 찔끔 났다.
그렇게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열심히 눈물을 훔치고, 다시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들도 다정한 빛을 내며 내게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고생했다고, 훌훌 털어버리자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있던 응어리들이 사르륵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밤바다와 밤하늘의 온기를 계속 느끼고 싶어서 여수 밤바다를 반복 재생했다. 그렇게 30분 동안 여수 밤바다를 들으며 밤바다 앞에서, 밤하늘 아래서 토닥토닥 위로를 받고 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응어리가 생각보다 컸었나 보다. 


때마침 멀리서 경찰처럼 보이는 두 명이 거기서 뭐하냐고 큰 소리로 날 부르며 얼른 돌아가라고 주의를 해왔다. 네덜란드어로 소리치긴 했지만, 경찰이 이런 곳에서 혼자 있는 날 보고 할 말이 돌아가라는 말 말고는 뭐가 있겠나. 그들의 외침을 못 알아들었지만 알아들은 나는 오케이 돈 워리라 큰 목소리로 답하고 베개 삼아 눕혀놨던 가방을 챙기고 일어서서 밝은 쪽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고마워.
이 말 한마디만 하고 다시 난 앞을 보고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생선 먹는 동상과 함께

사실, 바다 자체는 많이 와봤지만 나 혼자서 바다에 온 건 처음이라 더더욱 기억에 남는 스헤베닝언 북해였다. 혼자 와서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여수 밤바다 듣다가 밤바다 앞에서 질질 짜며 힘든 일들 훌훌 털어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날 밤바다의 손길과 밤하늘의 따스한 눈길, 그리고 여수 밤바다와 함께한 스헤베닝언은 아마 앞으로 수많은 바다를 오게 되더라도 절대 잊지 않을 곳이 되겠지. 다음에 오게 된다면, 그땐 꼭 이 바다를 함께 보고 싶은 사람과 와서 같이 여수 밤바다를 듣는 그런 밤이 왔으면 좋겠다.





다음 <그 겨울, 네덜란드 #3>에서는 원래는 나머지 헤이그 이야기를 쓸까 했다가, 그냥 바로 암스테르담 여정을 쓸까 합니다:)




여행한 나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공간 <나와 함께 떠나는 여행> 매거진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u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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